2024-03-29 00:53 (금)
추억의 책방 문을 열며
추억의 책방 문을 열며
  • 이주옥 수필가
  • 승인 2018.02.20 2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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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옥 수필가

 활자로 된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무조건 읽어댔던 초등학교 시절, 내 독서의 절정은 만화였다. 매일 참새 방앗간처럼 만화방을 기웃거렸고 신간이 들어오면 가슴부터 뛰었다. 어쩌다 간신히 100원짜리 동전 하나 손에 쥐면 부리나케 만화방으로 뛰었다. 새로 나온 만화에서 풍겨 나오던 휘발유 냄새도 향기로웠고 첫 장을 넘기던 순간엔 손까지 떨리는 것 같았다.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누군가 먼저 보고 있을 때의 그 실망감이란. 옆에 앉아서 읽지 않은 부분이 몇 장이나 남았는지 들여다보며 침을 삼켰다.

 어른이 돼서도 읽고 싶은 책을 사러 서점에 들르는 날이 제일 행복했다. 시인의 꿈을 꿨던 나는 주로 시집을 샀다. 김남조나 신달자, 이해인의 시집은 거의 빠짐없이 사서 잠을 설치면서 읽고 습작을 했다. 토지나 객주, 태백산맥 같은 장편소설들도 한 달에 한두 권씩 나눠서 구입하고는 했다. 그때였을 것이다. 사방 빼곡하게 책으로 둘러싼 작은 서점 하나 차리는 것이 내 꿈이 된 것이. 책 팔아 돈을 벌기보다는 읽고 싶은 책이나 실컷 읽자는 심사였다.

 얼마 전 결혼한 여자 아나운서가 퇴사하고 서점 주인이 됐다는 기사가 났다. 사진으로 보는 그곳은 꽤 고급스럽고 분위기 있는 책방이었다. 책마다 그녀만의 리뷰를 적어둔 것도 특별했고 차 마시며 담소할 장소도 있었다. 지나가다가 불쑥 들러 사진 한 장 찍고 싶어질 만큼 예쁜 서점이었다. 진열된 책만 봐도 저절로 마음이 정화되고 문학의 향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잔잔한 음악도 흐르고 향긋한 차도 마시며 유명한 여사장님도 직접 만날 수 있는 곳. 책방이 아닌, 마치 갤러리나 카페 같았다.

 각 지방마다, 문화의 중심이었고 지성의 산실이었던 서점 한두 개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전통 있고 유명한 서점의 폐업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급격히 줄어든 독서인구도 그렇지만 그저 책만 진열해 놓고 사고파는 것에서 벗어나 그 이상의 시대적 트렌드를 원하는 독자들의 취향을 충족시키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거기다 굳이 발품 팔지 않아도 되는 인터넷서점의 편리함까지 합세하니 전형적인 책방이 버티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인터넷서점에 들어가 작가나 제목 초성만 쳐도 내가 찾는 책은 씩씩하게 눈앞으로 받들어 총 한다. 10~20% 할인된 가격에 배송료 없이 하루면 집으로 배달된다. 아니다. 굳이 책을 사지 않아도 e-Book 코너에서 마우스 몇 번 까딱거리면 저렴한 가격에 읽을 수 있으니 집에 서재나 책꽂이가 없어도 된다. 아니 그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것도 없이 인터넷으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으면 되니 최소한의 비용도 지불할 필요가 없다. 얼마나 실리적이고 간단한 세상인가.

 소설 한 권, 시집 한 권에는 한 작가의 감성과 시간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 작가의 영혼과 호흡과 시대가 버무려져서 독자의 가슴은 널따란 바다로 출렁이고 향긋한 바람 냄새가 나는 숲이 된다. 아마 그것을 건네고 연결하는 곳이 서점일 것이다. 그 안에서 죽어있던 작가가 다시 숨을 쉬고 독자는 감성과 지성의 샘물에서 목을 축이는 것이 아닐까.

 책방 천장까지 닿게 쌓여 있던 책더미들, 매캐한 마른 종이 냄새. 작은 창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먼지마저 글이 되던 옛 서점의 풍경은 얼마나 평화롭고 따뜻했던가. 이젠 그저 네모진 작은 공간에 책꽂이만 두고 책만 꽂아 놓은 서점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신박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세련된 탁자와 의자도 배치해서 분위기 있는 카페처럼 꾸며 놓아야 한다. 화려해진 책표지에 어울리게 음악도 틀어야 하고 액자도 몇 개 걸어야 한다. 커피 머신도 마련해서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실 수 있어야 하고 모던한 간판에 세련되고 이국적인 이름도 붙여 달아야 한다. 반바지 입고 슬리퍼 끌고 저녁 마실 나섰다가 불쑥 들어가서, 선 채로 시 몇 줄 읽고 소설의 줄거리를 읽다가 불현듯 주머니 털어 한 권 살 수 있는 책방은 이제 추억의 거리에서 빛바랜 우체통이 되는 것일까. 소박하고 아담한 책방 주인이고 싶었던 내 꿈은 시대가 만드는 트렌드에 밀려서 주춤주춤 또 몇 발자국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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