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23:24 (금)
제천, 밀양 참사가 보여주는 적폐들
제천, 밀양 참사가 보여주는 적폐들
  • 오태영 사회부 부국장
  • 승인 2018.02.11 2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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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태영 사회부 부국장

 제천, 밀양의 화재 참사는 우리가 청산해야 할 적폐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관련법의 구멍, 허술한 재난 대응매뉴얼, 건성건성 하는 성의 없는 재난훈련 등 우리의 고질적인 병폐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제천 참사는 불이 나면 속수무책인 목욕탕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목욕탕에 비상구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목욕탕은 다중이용업소 특별법의 다중이용시설이 아니다. 당연히 주 출입구 반대쪽에 설치하도록 돼 있는 비상구를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 건축법의 적용을 받으나 이마저도 근린생활시설로 분류돼 비상구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나마 있는 경우도 상당 경우 물건 등을 쌓아놓고 있어 있으나 마나다. 다중이용업소 특별법은 중ㆍ고교생 56명이 사망한 지난 1999년 인천 호프집 화재사고로 만들어졌으나 위락시설, 일반음식점, PC방은 다중이용시설로 분류하면서도 목욕탕은 빼버렸다. 옷을 벗은 데다 물소리로 시끄러운 목욕탕은 방송으로 화재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면 제때 대피하기 어렵다. 여기에다 옷을 벗고 이용하는 특수성 때문에 건물구조는 대부분 밀폐돼 있다. 불이 나면 참사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밀양의 병원 화재 참사는 제천과는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환자가 많아 직원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대피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옷을 벗은 사람들이 많은 제천과 유사하다. 스프링클러 시설 설치의무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비상구 설치 대상이 아닌 제천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피훈련을 하기 어려운 제천과 달리 평소 대피훈련을 할 수 있고 또 철저히 해야만 할 병원의 특수성이다. 병원에서 평소 실제 화재 대응 훈련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제대로 한 것 같지는 않다. 제대로 했다면 10여 명의 환자가 보호대로 결박된 상태에서 질식사하는 일이 벌어졌을까. 지난 2014년 21명이 사망한 전남 장성 효실천사랑나눔 화재 당시에도 노인 환자 2명이 침상에 끈으로 묶여있었다. 장성사건에서 아무런 교훈을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더구나 밀양 세종병원에는 지난 2012년 지어진 불법증축건물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인천 호프집 화재사건에서는 업소 주인이 경찰에 돈을 건넨 수첩이 발견되기도 했다.

 판박이처럼 되풀이되는 안전사고를 보면서 일만 터지면 난리법석을 떨다가 얼마 안 가 까맣게 잊어버리는 우리의 양철 속성이 생각난다. 세월호 사고 때 우리는 철저한 재난 안전망을 약속했다. 다시는 이런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재난 대응매뉴얼을 재점검하고 대책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재난훈련은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건성건성 진행된다. 대피방송이 나오면 건물 바깥으로 바람 쐬듯 한번 나갔다가 들어오면 끝이다. 긴장감이나 재난의 의외성, 돌발사태에 대한 훈련은 찾아볼 수 없다. 사고가 날 때마다 안전불감증을 말하지만 여전히 재난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가 청산해야 할 적폐는 바로 이런 것들이다. 권력형 비리보다 먼저 청산에 집중해야 할 적폐들이다.

 또 하나 짚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만 터지면 정권 탓을 하는 일부 국민의 행태와 청와대의 과잉반응이다. 밀양 화재가 국가위기대응센터를 가동할 일인가. 긴급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고 군을 동원해 지원하겠다는 말도 나왔다. 정권을 뒤엎다시피 한 광우병, 세월호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사고가 나면 대통령이 직접 나선다. 하긴 세월호 7시간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그토록 곤욕을 치렀으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만 터지면 국정 최고 책임자가 나서는 것은 국정 운영 시스템상으로 봐도 적절치 않다. 세월호 사고가 대통령 때문에 일어나고 사고가 커진 것이 아니듯 밀양 화재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관심을 가지고 직접 챙긴다는 신호를 매번 국민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다. 대통령의 정신적 안정감과 여유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편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대통령도 세월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미국 9ㆍ11사태는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다. 그토록 끔찍한 테러와 국가적 비상상황에서도 미국의 대통령은 침착했다. 미국 국민들도 대통령에게 화살을 돌리지는 않았다. 사태수습도 줄리아니 뉴욕시장이 진두지휘했다. 우리라면 어땠을까.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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