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1:37 (금)
여류시인 이옥봉과 ‘미 투’
여류시인 이옥봉과 ‘미 투’
  • 이광수 소설가
  • 승인 2018.02.11 2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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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 소설가

  이씨 조선시대의 3대 여류시인이라면 황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을 말한다. 그중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은 한시(漢詩)를 썼고, 황진이는 시조(時調)를 지었다. 그런데 이옥봉이라는 시인을 조선 3대 여류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는 사람도 있다. 이는 이옥봉이 한시를 썼기 때문에 시조를 지은 황진이 대신 허난설헌, 신사임당, 이옥봉 세 사람을 조선 3대 여류시인으로 꼽는 것 같다. 물론 시조도 운문이기 때문에 시와 같은 장르에 포함시키기는 하지만 한시와 시조는 형식 자체가 엄연히 다르다. 따라서 이옥봉을 조선 3대 여류시인으로 지칭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우리들에게 다소 생소한 인물이지만 출신 성분으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아서이지 그녀가 지은 한시를 읽어보면 비범한 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TV를 보다가 우연히 그녀에 얽힌 야사를 보고 이옥봉 시인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다. 특히 그녀의 한 맺힌 운명을 묘사한 몽혼(夢魂)이라는 한시와 그 시에 얽힌 히든 스토리를 읽고 요즘 한창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미 투(me too)’가 문득 떠올랐다. 삼종지의와 남존여비의 관습에 얽매여 살았던 조선시대 여인들의 삶과 오늘을 사는 우리 여성들의 삶이 오버랩 되면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사랑했던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조선의 여류시인 이옥봉이 죽음으로 지킨 한시가 영혼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꿈속의 넋(몽혼 夢魂)근래안부여하(近來安否如何)/ 월도사창첩한다(月到沙窓妾恨多)/ 약사몽혼행유적(若使夢魂行有跡)/ 문전석로반성사(門前石路半成沙)요사이 안부를 묻나니 어떠하시나요/ 달빛 비친 사창에 저의 한이 어립니다/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됐겠지요

 이 시는 7언 절구 한시로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연모의 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승구(承句)에서는 그리움을 달빛에 비춰 하소연했으며, 결구(結句)에서는 꿈속의 발자취가 현실로 옮겨진다면 돌길이 반쯤 모래가 됐으리라 해 임을 만나고 싶은 애타는 심정을 그리고 있다. 반상의 차별과 남존여비의 굴레 속에 갇혀 산 한 조선 여인의 한 맺힌 사연이 서려 있는 통한의 시이다.

 이옥봉(李玉峰)은 생년과 졸년이 불명하지만 숙종 30년에 간행된 시문집 가림세고(嘉林世稿) 부록에 옥봉집으로 실려 있다. 옥봉은 숙원이씨(淑媛李氏)의 호이다. 이옥봉은 선조 때 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로 태어나 조원의 소실이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양반 가문 소실의 딸로 태어난 신분적 한계 때문에 첩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인 이옥봉. 그녀는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나 서녀 출신이라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충청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왔다. 한양 장안의 내로라하는 명사들과 어울리며 시귀나 짓는 선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됐다. 옥봉은 그때 조원이란 선비를 사랑한 나머지 자청해서 그의 소실이 됐다. 그때 조원은 옥봉을 소실로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절대로 시를 짓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았다. 전형적인 남존여비 사상의 극치였다. 그러나 옛 몸종인 산지기가 억울하게 소도둑으로 누명을 쓰자 파주 목사에게 시 한 수를 지어 탄원서를 보냈다. 몸종은 이 탄원서로 풀려났으나 시를 쓰지 않겠다는 약조를 어겼다는 이유로 조원으로부터 소박을 맞았다.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고 쓰고 싶은 시도 쓰지 못하게 된 그녀에게 삶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창호지에 빽빽하게 쓴 시 두루마리를 온몸에 칭칭 동아줄로 감은 채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시신이 조류에 밀려 중국의 해안가에서 발견됐다. 그때 중국의 원로대신들이 옥봉의 시를 보고 감탄한 나머지 그 시들을 모아 한 권의 시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집이 중국에 갔던 조선의 사신들에게 전해져 가림세고 부록에 옥봉집으로 실린 것 같다.

 물론 앞서 언급한 얘기는 고증된 내용이 아닌 전해오는 얘기라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한시들을 읽어보면 천재 여류시인이었음은 분명하다. 한 사람의 여인으로 태어나 온전한 인격체로서의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여류시인 이옥봉의 기구한 삶. 그녀의 한 맺힌 삶이 절절히 배여 있는 한시를 읽으면 격해지는 감정으로 가슴이 저려온다. 요즘 우리를 슬프게 하는 ‘미 투’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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