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13:55 (수)
40년 도공의 길은 운명… “변치 않은 뜻 작품에 새기죠”
40년 도공의 길은 운명… “변치 않은 뜻 작품에 새기죠”
  • 황현주 기자
  • 승인 2018.02.01 1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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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이 좋다 사람이 좋다-김해 사기장 지암(志岩) 안홍관
▲ 지암 안홍관 선생은 “200여 년의 분청사기는 우리 민족의 한의 정서와 애환, 염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말했다.

78년 故 김윤태에게서 사사

김해시 찻사발 지정요로 선정

후배에 힘주는 선배 희망

공부하는 자세로 창작성 높여

 4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길만을 걷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예술가는 그렇다. 작품혼과 예술혼이 큰돈을 벌어다 주는 것이 아님을 알고도 긴 시간 묵묵히 도자기를 구워내는 도예가 지암(志岩) 안홍관 선생은 도공의 길이 운명인 동시에 그 자신 자체가 돼버렸다.

 “제 호가 왜 지암이냐구요? ‘바위처럼 단단하고 변치 않은 뜻을 새기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것입니다. 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도봉 故 김윤태 선생님 밑에서 도공으로 수련할 때 지어진 호죠. 제 이름보다 지암이라는 호를 더 많이 알고 찾아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환갑을 훌쩍 넘긴 지암 선생은 김해 칠산동에서 태어나 지난 1978년 도봉 선생이 운영하던 상주요에

▲ 지암 안홍관 선생의 대표작 ‘어문호’.

입문해 그로부터 도예가의 길을 알게 된다. 20대 초반에 불과했던 청년 지암은 도봉 선생 밑에서 허드렛일과 잔심부름을 했고, 이 과정에서 스승의 서릿발과 같은 호통을 수없이 들어야만 했다. 그가 40여 년 전 도공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1975년 도자기에 관심이 많던 그의 백부가 그의 손재주를 보고는 비상함을 느끼고 도자기를 배워볼 것을 권유한 것이 계기다. 스승으로부터 정식으로 사사 받은 후 그는 장유 대청계곡 인근에 ‘대청요’를 설립했으나, 장유 신도시 개발붐이 한창 불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그곳이 자신이 설 자리가 아님을 알고 현재의 자리인 생림면 봉림리로 이전해 ‘지암요’라는 현판을 걸었다.

 지암선생은 국내뿐 아닌 일본과 중국에 6번의 그룹전을 가졌으며, 일본에서는 2번의 개인전을 치렀다. 김해시 찻사발 지정요로 선정됐으며, 선생은 올해 연말 혹은 내년 초 중국 북경미술관에 개인전을 개최할 것임을 밝혔다. 실제로 지난해 북경미술관장이 직접 지암요를 방문해 선생의 작품들을 눈으로 관람하고 감탄하면서 북경미술관에 전시해도 될 만큼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평가를 했다고 선생은 전했다.

 지암 선생은 분청사기장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은 청자와 백자도 만드는 도예가다. 백자와 청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청사기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는 그는 화려하면서도 도도한 매력을 뽐내는 청자와 아무것도 담지 않아 순수함과 그윽함이 가득한 백자 그리고 투박하지만 멋과 개성이 잘 살아 있는 분청사기를 하나하나 구분해서 설명해주었다.

 “김해 분청사기는 그야말로 ‘촌놈’이에요. 촌놈은 투박하지만 순박하고, 친근한 느낌을 가지고 있잖아요. 200여 년의 짧지 않은 역사를 품고 있는 분청사기는 14~16세기까지 만들어졌는데,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한의 정서와 애환, 염원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볼수록 정감 가는 도자기입니다.” 지암 선생에 따르면 분청사기의 형태부터 내뿜는 분위기까지 세계 유일하게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예술품이다. 형태가 투박한 이유는 서민들이 주로 만들었던 것 때문인데, 전문 사기장들은 흙의 질감을 따지면서 도자기를 만드는 반면, 분청사기를 만드는 서민들은 아무 곳에서나 흙을 채취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전문 사기장들의 손길을 거치면서 잘 잡힌 형태와 다양한 예술혼을 품게 됐다.

▲ 김해 생림면 봉림로에 위치한 지암요 전시관 내부. 선생이 혼을 다해 만들어낸 작품들로 가득하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백토를 붓으로 칠해 조각칼로 조화 또는 인화기법 등 일곱 가지의 기법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특히 분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빛깔이 부드러운 형상을 띠게 되는 것이고, 물고기나 꽃 등 서민들이 늘 상 보는 것을 소재로 그림을 더해 여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어 질리지 않는 은은한 멋을 자아내고 있다.

 “남들은 이제 제가 도자기 공부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40여 년을 한결같이 공부하고 있어요. 분청사기의 빛에 반해 현재까지도 흙을 찾으러 다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흙을 찾는 것이 무슨 공부가 되냐 하실지 모르지만, 암반이 풍화가 돼 흙이 되고 그것이 점토가 되고, 하나의 멋진 도자기가 돼 듯 우리 선조들은 자신의 살고 있는 고장의 자연환경에 맞게 분청사기를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관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이 역시도 저에게 큰 공부죠.” 지암 선생이 김해 지역에서 큰 사기장으로 명성을 갖고 있는 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성찰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편리한 가스가마 대신 전통 장작가마를 사용하는 이유도 분청사기가 가진 매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그 진가를 알아보든 보지 않든 선생은 개의치 않았다.

 “저는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가마를 엽니다. 경제성 원리로 따지자면 가스가마가 좋죠. 돈 몇 푼 때문에 여태 제가 고집하고 있던 도예가로서 진정한 가치를 저버릴 수는 없죠. 장작가마로 완성된 분청사기는 미세한 틈에 변화를 주도하고 그릇에 다양한 변화를 보여줘 소박한 아름다움을 극강으로 끌어냅니다.” 도예가를 꿈꾸는 후배들 사이에서 기라성 같은 존재인 지암 선생은 현재까지도 김해 지역의 명물로 분청사기가 자리 잡지 못 하는 이유와 도예가 후배들의 어려운 상황을 공감하고 있었다.

 지암 선생은 후배 도예가들이 개인전에 꾸준히 참가해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다. 막연히 생계 때문에 생활자기에만 치중해 작품 만드는 것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고 그들에 일침 했다. 전문가들에게 비평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분명 우리나라 도자기가 일본과 중국에 비해 놀랍도록 우수한데, 많이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현재 차문화 자체도 소강상태죠. 차문화가 활발하면 도자기 문화도 따라서 활발하게 일어나는 법인데, 차츰 중국에 선점되고 있다는 점이 씁쓸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래야 우리 후배들도 마음 편하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앞으로 지암요는 도자기를 통해 전통을 보전하고, 선조들의 뜻을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지암 안홍관 선생 프로필

1975년 김해 장유 도예입문

1980년 부산 무형문화재 제13호 김윤태 선생 전수자

1985년 김해 장유 ‘대청요’ 설립

1985년 경남전통도에작가 초대전(창원KBS)

1986년 부산문화호텔 개인전

1989년 창원 성안백화점 갤러리 개인전

1990년 울산 ‘지암요’ 축요

1993년 울산현대회관 갤러리 개인전

1999년 김해 생림면 ‘지암요’ 축요

2001년 부산 하야트호텔 갤러리 개인전

2002년 부산 롯데호텔 갤러리 개인전

2004년 김해장유문화센터 갤러리(김해다완발표전)

2005년 김해국립박물관-가야차 패스티벌(김해다완재현 논문발표)

2006년 서울 운현궁 노락당 ‘조선다완전’

2007년 경남다완 공모전 대상 수상

김해시지정 다완요장 선정

2008년 대한민국평화에술대전 문화부장관상 수상

일본 교토 노무라 미술관 김해다완전

부산 찻사발 전통명장

2015년 부산국제차문화어울림문화제 초대전

경남차사발 전국공모전 심사위원역임

국외전시 한중일 문화교류전 4회

아시아태평양우호협의회 초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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