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22:27 (토)
빛 좋은 개살구 ①
빛 좋은 개살구 ①
  • 양민주
  • 승인 2018.01.08 2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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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민주 시인ㆍ수필가

 오래전 빚을 얻어 조그만 아파트 2층을 분양받았다. 2층은 다른 층에 비해 매매에 따른 불이익이 있다고들 했지만, 나는 베란다에 식물을 키우기 위해서 햇빛이 적당히 드는 2층을 선택했다. 이사하기 전 아래층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방수공사를 꼼꼼히 했고 10년 넘게 식물을 잘 키우고 있다. 식물을 키우며 타는 가뭄이 오면 베란다 창을 열고 아파트 정원에 있는 나무에 물 분사기로 물을 뿌려주기도 한다.

 이때의 상쾌한 기분과 시들한 잎이 푸르게 변하면서 태양 빛이 공기 중의 물방울에 반사 굴절돼 생기는 일곱 빛깔 무지개의 아름다움과 정원을 가까이서 내려다보는 즐거움은 덤이다.

 아파트 정원에는 이사 올 때 작았던 나무가 지금은 십수 년을 자라 2층을 가릴 정도로 조그만 숲을 이룬다. 숲에 꽃이 피면 곤충들이 날아들고 새가 찾아와 즐거운 노래도 불러주고 간다. 가을에는 빨갛게 물든 이파리가 운치를 더하고 여름에는 창을 열고 밖을 보면 내가 꼭 나무 위에 앉아 놀고 있는 것 같아 더없이 시원하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간다는 주목과 잎이 예쁜 단풍나무, 둥글게 층을 이뤄 수형이 빼어난 측백나무, 까치밥 떠오르는 감나무, 곤충 대신 새가 꽃가루받이를 해주는 동백나무, 키 작은 철쭉, 꽝꽝나무 등이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매화나무와 살구나무가 나란히 자라고 있다. 아침마다 베란다에 나가 키우는 야생화들을 돌보다가 창밖으로 눈길이 가면 매화나무와 살구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매화나무는 사군자의 으뜸으로 만물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예쁜 꽃을 홀로 피워 봄을 가장 먼저 알려주어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이다. 그리고 늙은 가지에서도 꽃을 잘 피워 회춘과 사랑을 상징하고 매실의 맛은 새콤하면서 달아 건강식품으로 유용하게 쓰여 자연인이 좋아하는 나무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매화나무는 살구나무에 비해 초라하다. 처음엔 살구나무보다 둥치도 크고 수형도 좋았다. 해마다 사람들이 몸에 좋다는 풋매실을 따기 위해 장대로 두들겨 패고, 발로 차고, 손으로 흔들고 가지를 꺾었기 때문이다.

 올해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열매가 익기도 전에 털리는 시달림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익은 매실을 본 적이 없다. 어쩌다 잘 익은 매실을 본 사람들은 탐스러운 주황색으로 보기에 좋을뿐더러 생각만 해도 입안에 도리깨침이 돈다고 했다. 봄을 지나 여름이 오면 매화나무의 잎은 성글고 부러진 가지에서는 진물이 흘러나온다.

 반면에 살구나무는 매화나무보다 키도 크고 잎이 무성하다. 봄이 오면 살구나무도 매화 못지않은 꽃송이가 처녀의 생리처럼 하나씩 터지며 육감으로 벌어지는 흐벅진 꽃술을 보여준다. 꽃은 봄의 가로등 불빛에 더욱 야하다. 매실과 비슷한 시기에 열매를 달지만, 살구를 탐하는 사람은 없어 끝까지 열매를 익혀 때가 되면 떨어뜨린다. 여름이 오면 베란다 앞 정원에 노랗게 익은 살구가 한동안 달려 있어 즐거움과 풍성함을 전해주어 정이 많이 간다. 계절의 풍경을 과실로 그린다면 봄은 올망졸망하게 달린 푸른 매실이고, 여름은 탐스럽게 달린 노란 살구고, 가을은 주렁주렁 달린 붉은 감이고, 겨울은 나무 그 자체가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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