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임하는 부모의 책임감
방임하는 부모의 책임감
  • 김혜란
  • 승인 2018.01.03 2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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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 TBN ㆍ창원교통방송 진행자

  가끔 컴퓨터가 부러울 때가 있다. 리셋, 초기화되기 때문이다. 각종 힘든 일들이 모두 끝나주길 기대하면서 연말에 잠들었지만, 새해에 눈뜬 순간 여전히 진행 중인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새해에도 계속 사람들의 마음을 힘들게 했던 일 중 하나는 자식을 학대하고 방기한 사건들이다. 실종됐다던 고준희 양은 결국 친아버지와 그의 내연녀, 내연녀의 어머니 손에 의해 유기된 것으로 드러났다. 야산에 묻힌 고준희 양은 평소 좋아했던 인형과 함께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 사고로 죽었는지, 살해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결국 친아버지 등이 고준희 양을 죽인 것이나 진배없는 결과다. 죽은 후 7개월을 함께 산 것처럼 했던 사실도 관심을 가질 대목이다.

 부모 된 마음 구석이 힘들던 연말, 화염 속에 죽어간 삼남매의 영결식이 어제 있었다. 담뱃불을 이불에 꺼서 4살과 2살 아들, 15개월 된 딸을 숨지게 한 삼남매의 엄마는 구속됐다. 중학교 때부터 동거한 남편과는 생활고로 이혼한 상태였고 어린 자녀 셋을 네 시간 동안이나 방치한 후 돌아온 집에서 자녀들을 화염 속 질식사로 보내고 말았다. 20대 초반인 엄마는 화염 속 아이들을 구할 방법을 제대로 몰랐고 10분 동안 전 남편과 119에 전화만 했다고 한다.

 ‘부모 맞아?’ 두 경우를 보면서 공통으로 떠오르는 생각이다. 우리에게 부모 자리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이전 시대까지의 부모의 모습은 끊임없이 주기만 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배가 고프고 힘들어도 무조건 자식 먼저였다. 그렇게 절대적인 헌신(?)을 받고 살아온 자식들은 본 대로 배워서 그들 역시 자신들의 부모같은 부모가 돼갔다. 부모의 행동을 배우고 본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부모가 해줬던 것처럼 자식에게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몇 세대를 넘기면서 당연시 여겼던 부모의 역할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정확한 교훈을 하나 던진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셈법이다. 주고받는 것을 셈하는 일에 덜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러운 방법이지만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특히나 서양에서는 수백년에 걸쳐 실험과 실패를 통해 물질뿐만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 같은 정신적인 부분까지 함께 사회의 제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물질에 대한 부(副)만을 부각시켜 강제로 이식시킨 부분이 컸고 그 결과, 상상도 못 할 부작용에 시달리게 됐다. 자유를 방임으로,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부모세대의 장점을 묻어 버렸다. 물질적 부만을 추구하는 일그러진 욕망들은 우리 사회를 천민자본주의가 득세하는 사회로 만들었고 도덕이나 공동체 규율 따위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고준희 양 실종사건이나 광주 삼남매 화재사건을 또 보고 싶지 않다. 그의 친부는 부모의 기본 임무를 저버린 채 자녀의 고통을 돌보지 않았고 죽음으로 몰았다. 그러면서 타인들 앞에서는 훌륭한 부모로 보이도록 슈퍼맨 놀이를 했고, 아이는 땅속에 눕혀놓고 아동 보육 수당을 계속 받기 위해 살아있는 것처럼 죽은 딸의 생일까지 챙겼다. 비정한 자본주의가 만든 ‘괴물’이 아버지란 이름으로 그 정점에 서 있다. 십대 중반부터 동거를 통해 가정을 꾸려야 했던 23살 여자는 책임감 없이 낳기만 한 자녀 셋을 자신의 실수로 불 속에 방치했다. 아버지란 사람 역시 어린 자녀들을 외면한 채 친구들과 어울리고 게임을 즐겼다. 부모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 그들 탓에 더해, 책임 질 줄 아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 부모세대의 책임도 피할 수 없다.

 공자가 주장하던 공동체 사회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규율은 깨지기 시작한 지 오래다. 그저 익명으로 자신의 고유함을 생각하지 않던 부모 세대의 가치는 거의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대신 개별적인 각자가 자율성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며 삶의 주도권을 쥐려는 개인주의적 부모세대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런 중에 마치 세대교체 속 부작용 같은 모습이 이들일 것이라고 이성적으로 결론 내려 본다. 어떤 모습이든, 시간과 삶은 연속 선상에 있고 한 가지 모습을 억지로 도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컴퓨터처럼 ‘리셋’이 불가하다면 더 철저한 사회제도와 교육의 반성이 깊고 길게 있어야 할 것이다.

 고준희 양 실종 사건이나 삼남매 화재 사망 사건에서 그들 부모들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에 실마리를 찾아본다. 그동안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만, 오로지 행동에 대해서만 상과 벌을 줘서 교육이 된다고 믿었던 행동주의교육에 일대 전환점이 온 것은 아닐까. 행동 뒤에 감추고 있는 감정을 제대로 살피고 푸는 일이 교육이어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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