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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체전 10회 출전 10개 메달 획득… 이젠, ‘링 재판장’이죠
전국체전 10회 출전 10개 메달 획득… 이젠, ‘링 재판장’이죠
  • 황현주 기자
  • 승인 2017.12.17 18: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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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이좋다 사람이좋다
▲ 박기봉 심판위원장은 현재까지도 현역 선수들 못잖은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한 ‘심판훈련’을 하고 있다.

박 기 봉

<경남복싱협회 심판위원장>

15세부터 아마추어 선수 생활

복싱 국가대표 상비군 발탁

2002년 중앙심판위원회로 첫발

“심판 똑바로 해라” 듣고 각성

복싱 즐기는 ‘체육관’ 건립 꿈

 인류가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즐겨했던 스포츠 중 하나가 바로 복싱이다. 양손에 글로브를 낀 채 오직 두 주먹만으로 승패를 결론짓는 다소 진부하고 단순한 방식을 띠고 있지만, 그렇기에 누구나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운동이라 현재까지도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이 많다.

 박기봉 경남복싱회 심판위원장에게 복싱이란 운명 그 자체다. 농사짓는 것밖에 허용되지 않았던 1980년대 초 진영에서 단지 키가 컸다는 이유만으로 매의 눈을 가진 체육 교사와 코치에게 전격 발탁됐다. 고된 훈련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10번의 전국체전을 통해 10번의 금메달을 목에 건 박 위원장은 1990년 후반 은퇴를 한 후 경남복싱회 심판위원장으로 제2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가 몸담고 있는 복싱회 심판위원에는 총 50여 명의 심판들이 소속돼 있다.

 “초등학교 때는 육상을 했었는데, 중학교 진학하고 나서 복싱을 시작하게 됐어요. 복싱이 얼마나 힘든 운동인지도 모르고, 체육 선생님과 코치님이 시키니까 하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복싱 자체가 저에게는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영 토박이인 박 위원장은 이북초와 한얼중, 진해중앙고, 경남대 체육학과를 차례로 졸업했다. 중학교 2학년에 재학하던 당시 체육 교사와 진영대한종합체육관에서 복싱 관장으로 있던 안병운 관장의 발탁이 아니었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안 관장은 깡마르고 키만 컸던 그가 장차 복싱 유망주로 성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대번에 한 것이다.

 육상을 그만두고 아마추어 복싱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선수로의 생활은 생각만큼 녹록잖았다. 특히 첫 시합을 나갔을 때 그는 1회전에서 탈락되는 비운을 경험해야만 했다. 3회전까지 시합을 치러야 했지만, 경험과 체력이 뒷받침돼주지 않았다.

 “1회전에 그렇게 탈락되고 나서 오기가 생겼어요.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차겠다는 그런 꿈보다는 2ㆍ3회전 차례로 성과를 한번 내어보자는 욕심에서부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굵직한 대회에서 금메달도 따게 되더군요. 어떤 운동이든 자기가 재미없으면 도중에 그만두기 마련인데 상당한 자부심과 재미를 느끼니 분발을 할 수밖에 없었죠.” 박 위원장이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경기는 1994년 치른 제17회 아시아복싱선수권대회 2차 선발전과 1997년 치른 제27회 대통령배 전국 시ㆍ도 복싱대회에서 헤비급으로 출전해 각각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이다. 또한 전국체전에 열 번 출전해 모두 금메달을 휩쓸고 다녔다는 것도 큰 자랑거리 중 하나다.

 장기간 아마추어 복싱선수로 활약해오면서 박 위원장에게도 좌절의 순간은 매번 있어왔다. 그중 하나가 바로 국가대표 선발전 시합 당시였다. 최강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 중 한 명으로 발탁돼 링 위에서 뛰었지만 아쉽게도 마지막 3회전에서 상대 선수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다 이겨놓은 게임이었는데 막판에 체력이 뒷받침돼주지 않아 좌절된 것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다가왔죠. 지금도 그 당시를 간혹 떠올릴 때면 후회를 많이 해요. 제가 패배를 하게 된 이유는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바로 나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 자책도 많이 하기도 했죠. 그래서 저는 후배 선수들에게 선수 생활 하는 내내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1990년 후반 은퇴를 한 이후 박 위원장은 경남대학교 체육 교육학 석사를 취득함과 동시에 복싱심판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현역으로 활동하던 선수들이 유망주를 길러내기 위해 체육관을 개업하는 것이 예사이고, 그도 한 때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젊고 유망한 후배 선수들이 공정한 판정을 통해 올곧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심판으로 돕는 역할도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 경기 시작에 앞서 여유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기봉 심판위원장.

 “지난 2002년 처음 중앙심판위원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심판의 길을 걸어 나갔죠. 심판은 링 위에서는 재판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공정하게 판정을 내리는 것이 복싱유망주들에게도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판의 말 한마디, 판정 한 번에 경기를 임하는 선수들의 일생이 좌우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늘 신중에 신중을 기하죠.” 지난 2013년 개봉된 영화 ‘전설의 주먹’이 떠올려지는 순간이다. 88올림픽에서 복싱챔피언을 꿈꾸던 주인공 임덕규(황정민)는 심판의 잘못된 판정 때문에 출전권을 놓치면서 결국 비행 청소년의 길로 들어선다. 영화 속 이야기처럼 실제 많은 유망주들이 심판의 잘 못 된 오심으로 인해 선수 생활을 접고 마는 비운이 알게 모르게 잠식돼 있다는 것을 박 위원장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박 위원장은 심판이 되고 나서 현역 시절보다 더 많은 공부와 체력관리가 필요함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새벽 일찍 일어나 조깅과 스텝을 밟는 것으로 밤늦게까지 현역선수 못잖은 ‘심판훈련’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경기 시작 일주일 전부터 체력과 순발력 등을 기르는 그는 오로지 경기에만 집중을 하며, 심판 활동에 필요치 않은 행동은 절대 금한다. 그것이 심판 박기봉의 가장 큰 철칙이다.

 아마추어와 프로 경기는 서로 다른 룰을 정해놓고 있지만 5심제라는 것은 똑같다. 아마추어 경기에서는 경기당 총 여섯 명의 심판위원이 투입되는데, 이 중 ‘래프리’로 불리는 주심은 한 명이고, 링 아래 앉아 점수를 매기는 부심은 다섯 명이다.

 단 한 선수도 억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철저하게 공정을 기해야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라 간혹 예상치 못한 실수가 발생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박 위원장은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의 코치들로부터 “판정 똑바로 해라” 등의 거친 야유를 숱하게 받아왔다고 한다. 그것이 심판으로 임무를 수행할 때 가장 걸림돌이 되는 요소 중 하나로 꼽았다.

 박 위원은 선수 생활을 오래 지속하고 싶으면 건전한 여가활동으로 스트레스를 즉각 푸는 것과 몸 관리를 잘 할 것 그리고 국제 규정이 자주 바뀌고 있는 만큼 경기 참여도를 높여 적응을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후배들을 상대로 당부했다. 아울러 그는 현역선수 시절 스트레스가 극도로 쌓여 있을 때 가수 이선희의 음악을 들으며 풀었음을 말하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의 최종 꿈은 ‘박기봉 복싱체육관’을 여는 것이죠. 복싱 유망주를 양성하는 것은 물론 누구나 쉽게 복싱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여는 것이 현재 저의 꿈입니다. 복싱 하나만 잘 해도 어떤 일을 하든 자신감이 따라올 수 있도록 제가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의 최종목표가 되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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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봉 경남복싱협회 심판위원 프로필

ㆍ경남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석사

ㆍ국가대표 상비군(복싱)

ㆍ전국체전 10번 출전 및 메달 10개 획득

ㆍ제17회 아시아 복싱선수권대회 2차전선발전 금메달

ㆍ제27회 대통령배 전국 시ㆍ도 복싱대회 내 헤비급 금메달

ㆍ뉴질랜드 복싱대회 출전

ㆍ제34회 대통령배 전국 시ㆍ도 복싱대회 경남단장

ㆍ2004 대한복싱협회 중앙 심판위원

ㆍ(전)경남 생활체육 복싱연합회 실무부회장

ㆍ(전)경남줄넘기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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