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18:27 (목)
蒙古風(몽고풍)
蒙古風(몽고풍)
  • 송종복
  • 승인 2017.12.07 0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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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蒙:몽-입다 古:고-옛 風:풍-풍속

 몽고풍은 변발, 호복, 고고, 장도, 연지 찍는 풍속, 언어에 ‘치’로써 장사치, 벼슬아치, 양아치, 만두, 수라상, 두루마기, 저고리, 설렁탕, 소주 등 거의 몽고의 풍속에서 온 것이다.

 몽고풍이란 고려가 원의 지배하에 있을 때 몽고의 풍속이 고려에 들어와 유행했는데, 이를 ‘몽고풍’이라 한다. 이와 반대로 고려 풍속이 몽고에서 유행하는 것을 고려양이라 한다. 고려는 39년간(1231-1270)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1356년 공민왕의 반원 운동이 성공하기까지 원(몽고,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는데, 이때 풍속이 상호 교류됐다.

 몽고풍(蒙古風)은 변발(변髮: 머리 깍기), 호복(胡服: 만주복), 고고(姑姑: 족도리)와 수화자(水靴子: 비 올 때 신는 무신의 장화), 남자의 착수의(소매가 좁은 옷), 홀태바지(통이 매우 좁은 옷), 남녀가 옷고름에 차는 장도(粧刀), 신부의 연지 찍는 풍속 등이다. 또한 언어에 있어서 ‘장사치’, ‘벼슬아치’, ‘시정아치’ 등 사람을 가리키는 말끝에 ‘치’라는 언어습관, 왕의 진짓상을 수라[水剌] 상이라고 하는 말 등 오늘까지 전하고 있지만 이것이 몽골어라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지금도 쓰고 있는 만두, 설렁탕, 소주와 같은 음식문화, 두루마기와 저고리 같은 의복도 몽골의 영향이다.

 몽고풍을 없앤 분은 고려 31대 공민왕이다. 자신이 ‘변발’과 ‘호복’차림으로 전상(殿上)에 앉아 있으니, 감찰대부 이연종(李衍宗)은 ‘변발과 호복은 선왕(先王)의 제도가 아닙니다’라는 간언에 따라, 즉시 변발과 호복을 걷어치웠다. 그리고는 왕은 즉위 1년(1352)에 반원 정책을 씀으로써 고려왕실 의식으로 존주권(尊主權)을 재확립한 꼴이다. 또한 몽고에서 고려의 여자를 요구해 해마다 약 150명의 여자들을 징집해갔다. 순결성과 정조관념이 유달리 강한 고려 여인들에게 ‘공녀’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에 여아들은 키(箕)를 머리에 쓰고 걸을 때 땅에 거슬리면 결혼시키는 조혼풍습이 생겼다.

 이 외에도 몽고 풍속으로 ①명절 때 친지를 방문하고 음식을 나눠 먹는 풍속, ②조상의 초상을 모시고 향을 피우며 음식을 바치는 풍속, ③식당에서 신선로, 설렁탕, 순대를 즐기는 풍속, ④신발이나 버선 등에 코를 세우는 풍속, ⑤천의 구김살을 펴기 위해 인두를 사용하는 풍속, ⑥사찰과 문화재에 태극무늬를 많이 그려 넣는 풍속, ⑦전통 혼례복 사용 풍속은 몽골(몽고)과 유사하다.

 고려의 연인들은 웃옷과 아랫도리를 하나로 잇고 소매가 헐렁한 포를 입었는데, 이때부터 웃옷과 아랫도리를 따로 재단해 이어 붙이고, 아랫도리에 주름을 많이 잡아 활동에 편한 몽골식 의복(철릭)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왕과 왕비에게 붙이는 ‘마마’, 세자와 세자비를 가리키는 ‘마누라’, 임금의 음식인 ‘수라’,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등은 몽고 시대에 수입된 언어들이다. 당시의 문화교류가 깊듯이 앞으로도 몽골과 문화교류가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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