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0:41 (금)
사라지는 것에 대한 단상
사라지는 것에 대한 단상
  • 이주옥
  • 승인 2017.12.05 2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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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옥 수필가

 가을비 촉촉이 내리는 오전 10시쯤에, 아니 하얀 눈 펑펑 내리는 오후 4시쯤에 마시는 커피 한 모금만큼 맛있고 따뜻한 것이 또 있을까. 그땐 이름도 복잡하고 쓴 원두커피보다는 지구촌 어디에서나 환영받는 황금비율의 믹스 커피라면 더 좋다.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냄새는 커피 향인가. 코끝을 맴도는 커피 향은 사람 마음을 다독여주며 그리움에 빠지게 하는 마력을 지닌 듯하다. 또한 사람에게 말 나누기에 가장 적당하고 가장 친밀하게도 만드는 소통의 매개임에도 틀림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원두커피 집이 늘어났다. 자그마치 9만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제 프림과 설탕이 섞인 일명 다방 커피는 특별한 기호를 가진 사람이나 마시는 커피가 된 듯하다. 나도 종종 달달한 믹스커피 한잔이 심하게 당기는 날이 있다. 바로 비 내리는 날이다. 그때 길을 걷다 발견한 어느 자판기에서 빼 마시는 커피 맛은 한마디로 기막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커피자판기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길다방이었다. 눈만 돌리면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었고 동전 서너 개만 있으면 언제나 뜨겁고 달콤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간혹 어느 역이나 어느 빌딩에 있는 커피가 맛있다는 얘기까지도 있었을 정도다. 자판기 옆 쓰레기통엔 흘린 커피가 찐득하게 묻어있고 마시고 버린 종이컵이 수북했지만 그런 지저분함과 비위생적인 것조차도 자판기 커피 맛에 포함할 정도로 만만하고 친숙했다.

 하지만 커피전문점이 늘어나고 경쟁력이 필요하다 보니 맛보다는 가격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을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점심값보다 더 비싼 커피값이 화제더니 이젠 다퉈서 1~2천원짜리 원두커피를 판매하며 저렴한 가격을 강조한다. 그래서일까. 이젠 웬만해서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마시지 않고 원두커피 집으로 몰리는 것 같다.

 자판기 커피 판매 사업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던 사람은 실제로 5년이면 집 한 채 살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젠 옛 영화(榮華)로 사라진 얘기다. 자판기를 설치하는 곳도 드물지만 있다 해도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될까. 우리 동네만 해도 서너 평 되는 가게에 젊은 청년들만으로 이뤄진 커피 집은 언제나 문전성시다. 주부들조차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돌아가는 걸 보면 원두커피는 일상에 깊이 들어있는 소모품이 분명하다.

 커피 집의 증가는 물론, 원두커피의 효능이 부각됨으로써 자판기 커피는 슬그머니 천덕꾸러기가 됐다. 사람들 또한 오래된 것에 흥미를 잃고 쉽게 싫증을 낸다. 늘 새로운 것을 원하고 쉽게 달라지는 현상을 그저 발전이고 변화라며 반긴다. 커피자판기도 마찬가지다. 손에 동전 서너 개만 있으면 취향껏 골라 언제든 마실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편했을 터인데 이젠 다소 값이 비싸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위생과 효능을 따지며 홀대한다. 한 집 걸러 늘어선 원두커피 전문점. 값은 자판기 커피값의 열 배가 넘지만 굳이 값에 연연하지 않고 제대로 로스팅 된 원두에 전문 바리스타가 추출해 주는 커피를 마시려고 한다. 또한 비위생적인 관리도 한 몫 단단히 했을 것이다. 나도 자판기에 있는 모든 메뉴들이 한 통로로 나오게 만들어진 기계가 실은 늘 못마땅하고 께름칙하긴 했다.

 어느 것이든, 무엇이든 오래 제자리를 지키며 머무르지 않는 세상이다.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을 단시간에 밀어내는 것이 문명의 역할일까. 쉼 없이 밀려나고 탄생하는 문화는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현대인은 머무르는 것들 속에서 답보와 진부함을 느끼는 것일 뿐인가. 문화를 받아들이고 누리는 사람들은 기존의 것들을 오래 품고 쓰다듬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것이 다가오면 미련 없이 그것들을 향해 달려간다. 동전 2~300원이면 몸과 마음을 세상없이 따뜻하게 했던 자판기 커피 한잔. 이제 우리는 짤랑 이는 동전 몇 개로 어떤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오늘도 천원짜리 지폐 서너 장 들고, 아니 날카로운 카드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입에 붙지 않는 커피 집 메뉴판을 진지하게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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