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21:32 (토)
어떤 동행 ②
어떤 동행 ②
  • 이은정
  • 승인 2017.12.04 2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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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정 수필가ㆍ김해문협회원

 낮은 돌담 밑에 늦게 핀 코스모스 한 무리가 위로하듯 나를 쳐다본다. 끝물 꽃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는 끝물 인생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전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채울 수 없는 허기가 뱃속으로 스며들었다. 식당을 겨우 찾아서 들어가 보니 ‘메밀요리 전문’이라는 간판 아래 출입문에 달린 자물쇠가 퉁명스럽게 나를 밀어낸다. 축제가 끝나면 영업도 끝인가 보다. 옆 농막의 마당에 널어둔 흙 묻은 고구마를 한 개 쥐고 껍질 채 베어 먹었다. 낡은 집들, 옛날식 다방, 라면 오뎅 등의 간판을 바라보며 어슬렁거리고 걷다가 작은 마트에서 빵과 우유를 사서 길가의 돌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시장기를 채웠다.

 집으로 가는 기차는 오후 여섯 시, 차표를 사니 한 시간은 입석이고 한 시간은 좌석인 절름발이 표다. 시간이 많이 남기에 하동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학창시절에 밥 먹듯 하던 무임승차의 추억을 떠올리며 차표도 사지 않고 태연하게 빈 좌석에 앉는다. 북천에서 네 정거장, 삼십 분 만에 하동에 도착했다. 책가방을 움켜쥐고 역사의 개나리 울타리 사이로 쏜살같이 빠져나가던 소녀와 하동역 정문으로 태연하게 걸어 들어가는 황혼의 여자. 두 개의 풍경이 교차한다.

 역무원에게 걸려서 정상운임의 열 배를 지불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나는 우리나라 철도청에 끼친 손해를 조금 변상하는 기회가 되었을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동에 왔으면 박경리 문학의 발자취를 찾아가야 하는데 시간상 어쩔 수 없고 배도 고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는데 나의 고독한 여행이 오죽하랴. 빵 한 조각의 부실한 요기로는 어림없다는 뱃속의 신호다.

 역 부근을 두리번거리다가 발견한 식당, 파를 다듬던 늙은 여자가 반긴다. 허름한 식당 한편에 팔십 대의 노인 한 분과 육십 대로 보이는 여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 손님이 없다. 재첩국을 주문해서 먹었다. 배고픔에 먹긴 했지만, 이전에 하동포구에서 맛보던 국물 뽀얀 재첩국 맛은 아니었다.

 식사하는 동안 주인 여자도 노인의 환담 속에 끼어들었다.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짐작하건대 알맹이 없는 낙엽 같은 이야기, 또는 청춘의 부스러기 같은 음담패설 정도가 아닐까 싶다. 깊게 팬 주름 속에 그의 인생 지도가 다 보이는 것 같은, 그래도 아직 한창이라고 우기는 얼굴을 하고 슬며시 일어난 노인이 이상한 몸짓으로 막춤을 추었다. 마주 앉은 여자가 일어나더니 나름 섹시한 막춤으로 화답했다. 그들은 좋아라고 웃었지만 나는 썰렁한 허무개그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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