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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행 ①
어떤 동행 ①
  • 이은정
  • 승인 2017.11.27 22: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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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정 수필가ㆍ김해문협회원

 가을이다. 조석으로 부는 서늘한 바람 속에 한 계절이 물러가고 또 한 계절이 다가왔다. 하루가 다르게 기후가 변하고 만물이 모습을 바꾸는 계절, 성장을 멈춘 것들이 결실과 소멸로 이어지는 순환이 빠르게 진행되는 시기이다.

 피부로 느끼는 서늘한 감촉이 여름 더위에 늘어졌던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낮게 가라앉은 그 감정은 쓸쓸함과 고독감, 우울함을 동반한다. 누구나 가을이면 그런 마음이 들겠지만, 나의 경우는 다른 이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느끼기에 그것을 계절병이라고 부른다.

 계절병의 증상은 다양하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쯤 와 있는가? 하는 철학적인 문제부터 소소한 삶의 일까지 끝없는 생각을 하며 밤잠을 설친다. 멀리 있는 사람이 자주 그립고 이미 내 곁을 떠난 사람이나 저세상으로 간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며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 내가 누려야 할 삶의 시간이 노루 꼬리처럼 짧아져 가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육신은 엇박자를 내는데, 더는 발전하지 못하는 초라한 자신을 떠올리면 병의 증세는 심각해진다. 어쩌면 익숙해진 그 계절병의 카테고리 속에 나 자신을 스스로 가두어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지식인의 ‘멜랑콜리의 재해석’ 이란 글을 보면 우울증은 꿈을 가진 자의 병이요, 타인의 우울에서도 자신의 꿈을 발견한다고 했다. 우울한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말이 되겠지만 이제 나에겐 꿈이 남아 있지 않다. 꿈이 아닌 바람이 있다면 잘 늙고 잘 죽는 희망 사항이 있다고나 할까. 참 쓸쓸한 이야기이다.

 ‘멜랑콜리’ 발음도 부드러운 그 단어를 달콤한 서양과자처럼 입속에 굴리며 혼자만의 호젓한 여행을 떠나볼까. 어딘가로 무작정 떠나고 싶은 마음, 그것 또한 나의 계절병 목록에 들어있으니까.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없는 날이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은 무기력을 불러오고 쓸쓸함을 더한다. 계획된 일이 없을지라도 책을 읽거나 집안일을 해도 되지만 내 마음의 방향은 다른 곳을 보고 있으니, 계절병에 대한 순응이다.

 쓸쓸한 가을 여자가 마음 편히 찾아갈 곳은 아름답거나 화려한 곳은 어울리지 않는다. 코스모스 축제가 끝난 지도 제법 된 북천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떠나는 것이다. 추석 후 세 번의 제사를 지내는 대사를 치렀으니 하루의 일탈쯤 맘 편히 즐겨도 좋을 거라는 보상심리가 내 발걸음을 더욱 부추겼다.

 기차를 탔다. 경전선 복선 공사가 끝난 지도 몇 해, 그림처럼 조용하던 간이역 대신 반듯한 새 역사가 생기고 자주 이어지는 터널들이 생각의 길을 자꾸 끊어 놓는다. 인생은 철로와 같다는 말이 있다. 평탄한 길과 모퉁이 길, 내리막과 오르막, 그리고 암흑 같은 터널 속이 우리네 삶의 모습과 닮았다. 그래선지 기차를 타면 늘 익숙한 편안함을 느낀다.

 기차는 두 시간 만에 북천역에 도착했다. 축제가 끝난 북천역은 쓸쓸한 간이역 그대로였다. 조용한 역사 안으로 들어서니 휴게실 벽에 코스모스 꽃에 대한 유래를 적은 글과 ‘간이역’이라는 시화가 오랜만에 오는 손님을 반긴다.

 아무도 없는 축제장을 천천히 걸어보니, 몇 년 전에 와 보았던 아름다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논배미에 가득 심어진 코스모스들은 이미 제 명을 다하여 무심히 누워있고, 부실한 열매를 맺은 메밀은 수확하지 않은 채 삭아져 가고 있었다. 지금의 내 모습과 친구 하기 딱 좋은, 어쩌면 내가 바라던 풍경들이 아닌가. 그 풍경 속으로 주저 없이 들어갔다. 쓸쓸한 풍경에 쓸쓸함을 더하며 갈 곳 없는 여자처럼 방향 없이 걸었다. 꽃밭에서, 또는 음식점 늘어선 텐트 옆에서 북적이던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아름다운 가을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행복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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