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소년법은 몇십 년 전에 생물학적 나이를 기준으로 만든 법이라서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몇몇 전문가들이 말한다. 국내보다 엄격한 외국의 사례도 든다. 영국이나 호주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형사 미성년 연령을 한국(14세)보다 어린 10세 미만, 캐나다나 네덜란드는 12세 미만으로 정하고 있다. 자신이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형량을 적게 받을 것을 알고 이를 악용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며 소년법의 나이 제한도 바꾸고 성인과 같은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반면 판단력 등이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을 무조건 처벌한다고 범죄 예방이나 근절에 확실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다. 어린 나이에 중범죄자로 처벌받게 된다면 평생 범죄자라는 낙인 속에 살 수밖에 없고 재범의 확률을 높이는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소년 범죄자를 보호하는 법이 세계적으로 거의 모든 국가에 존재하는 것은 청소년은 아직 채 성숙하지 못한 존재라는 인식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훨씬 성숙하고 성인에 가까운 청소년들이 정신적으로 그만큼 성숙한지를 보면 오히려 이전 시대보다 더 퇴보했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우리 교육의 총체적인 문제가 감당 못 할 모습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학교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또 왜 학교냐’ 고 묻는다면, 공인된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가정교육도 중요하지만 절대적으로 학교가 가진 영향력이 크다. 아이들이 어느 곳보다 긴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는 해도 되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하라는 것은 공부뿐, 모조리 하지 말라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은 하라는 것조차 일방적인 명령이다. 기준을 세워놓고 그 기준을 강요한다. 물론 사회로 나가서 적응하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덕목을 그런 식으로 가르치는 거라 말하지만, 모두 합쳐 섞어서 나눠보면 학교에서 가장 필요한 학생들의 덕목은 말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순종’이다. 윤리나 사회생활에 대한 덕목을 강요한다면 방법상의 문제가 있어도 개선하면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강요의 내용은, 혹은 강요가 가리키는 방향은 성적과 공부, 대학입시와 출세의 개념에 99% 이상이 맞춰져 있다. 학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잣대는 평가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평가는 피할 수 없는 기준일 것이다. 인정욕구를 채우는 데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만큼 다양한 평가의 기준을 보여주고 가르쳐줘야 할 곳이 학교다.
성적과 입시의 기준만으로 평가를 당한 청소년들은 일렬로 줄 서게 된다. 겨우 한 개의 기준으로 줄을 서게 된 아이들은, 사실은 그 한 개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것과 평생을 결정짓는 기준으로서의 ‘빨간 줄’위에 서 있는 것이 된다. 범죄로 그어지는 ‘빨간 줄’과 비교해 얼마나 다를까. 오로지 한 줄에 선 아이들은 뭔지 모를 답답함에 발버둥 친다. 개개인이 서로 너무도 다를 뿐 아니라, 그야말로 생물학적 나이에서 야기한 뜨거운 피 때문이다. 거의 꼴찌 쪽에 선 아이들은 자신을 믿지 못하고 힘들어하다가 종국에 스스로를 버린다. 앞쪽이나 중간쯤에 선 아이들도 다양한 기준 따위 전혀 모르는 채로 살아간다. 스스로를 버린 아이들이 저지르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으며 오만과 왜곡된 기준에 가둬진 아이들 역시, 그 기준 위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어디론가 폭발시킬 수 있다. 어쩌면 학교가 아이들에게 공인된 ‘폭력’을 먼저 가르치고 저지른 것은 아닐까.
처벌강화는 가장 손쉽고도 단순한 대책이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소년법 폐지 청원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이 정말 답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고개를 흔들고 싶다. 법으로 임시처방은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절대로 완전한 답은 될 수 없다. 늦었지만, 오래 걸리더라도 교육의 근간부터 다시 살펴봐야 한다. 투 트랙이 아니라, ‘천지사방 트랙’으로 우리 아이들을 ‘폭력’에서 건져내야 한다.
같은 나이인 피해자는 학교를 그만두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평생동안 우울증 약을 먹게 될수도 있고, 정상적인 사회생활과 결혼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피해자에게 '너를 다시 성폭행할테니 기다려'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