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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쌀밥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흰 쌀밥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 송종복
  • 승인 2017.08.28 2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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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우리나라 사람들이 배불리 쌀밥을 먹게 된 것은 1976년부터이다. 6ㆍ25 한국전쟁 때만 해도 대도시나, 시골은 머슴을 거느리는 부자 정도나 먹었지 백성의 80% 이상은 쌀밥을 먹지 못했다. 추수한 벼는 일제에게 공출하고 먹을 것이 없어 대개가 쌀 30%에 무, 쑥을 섞어서 밥을 지어 먹었다. 봄에는 보리가 익기 전에 주로 고구마로 끼니를 떼웠다. 또한 보리가 익어 고개를 숙이기 전에 배가 고파서 보리 목을 따서 가마솥에 삶는다. 그 덜 익은 보리를 삶아 찍어서 보리죽으로 허기를 띄운다. 이같이 배고픔이 극에 달할 때를 ‘보릿고개’라 했다.

 6ㆍ25 전란으로 백성들은 굶주리고, 산들은 민둥산이 되고, 주택은 초가집으로 비가 새는 정도였다. 전등, 에어컨, 전화, TV는 구경도 못 했고, 겨우 미국의 원조인 우유와 석유배달로 연명했다. 신은 고무신으로 바지는 사철 그대로 입었다. 초등학교에 가려면 사친회비(師親會費)가 없어 못가는 편이 많았고, 중등학교는 부자 정도만 다닐 뿐이었다. 국립대학교(도 단위 1개 대학)엔 면 단위로 겨우 3~4명 정도였다. 60년대 초 한 학기 등록금은 1만 3천원 내외였다. 반면 사립대학은 국립의 3배나 됐기 때문에 시골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어려운 사회에 군사혁명이 일어나 정치, 경제, 사회의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그리고 재건 운동과 4H 운동으로 새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고, 국민은 희망이 부풀었다. 이어 1970년 초에는 전국에 새마을 운동이 울려 펴졌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이에 전 국민은 희망을 가졌고, 당시 농업사회에 새 품종의 볍씨가 들어와 농작물에 혁명이 일어났고, 이제부터 가난한 농가에서도 쌀밥을 먹게 됐다.

 벼의 역사를 보면 최초로 재배는 ‘가와지 볍씨’다. 이는 1991년 경기도 고양시 개발과정에서 발견됐고, 집의 당호를 따서 ‘가와지 볍씨’라고 이름 지었다. 그 후 1997년에 충북 청주시 옥산면 소요리에서 볍씨가 발견됐다. 이를 ‘소요리 볍씨’라 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청주는 이를 상징해 볍씨조형물까지 세웠다. 그러나 사람이 직접 재배한 흔적은 없다. 벼의 재배는 인도가 BC 7천년, 중국은 BC 5천년경이라 전하며, 우리는 BC 2천년경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만 해도 평민들은 조나 보리를 먹었고 귀족만이 쌀을 먹었다. 이유는 밥을 지으려면 쇠솥이 필요한데 일반 백성들은 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주로 쌀밥 대신 쌀떡과 쌀죽을 해 먹었다. 6세기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숟가락이 발굴됐지만 그 외는 고려 초까지 발굴되지 않는다. 이로 보아 고려 후기 원(몽고)나라 문화가 들어와 숟가락을 사용하고, 또한 밥을 해 먹었다고 한다. 따라서 조선 시대 이전에는 쌀밥은 귀족과 왕의 전유물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13세기 중엽 고려 공민왕 때 백성들이 모내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전국적인 모내기 실시는 아니었다. 17세기 영조대왕 시대부터 전국적인 모내기가 시작됐다. 이로 보면 쌀밥은 왕족이나 귀족만이 먹었지 일반 백성이 먹을 수 없었다는 증거다. 지금 젊은 사람에게 이런 얘기는 꿈같이 여기지만 필자는 이 과정을 겪었기에 어릴 때 보리밥과 죽에 향수가 있어 언급해 본다. 젊은이여. 70~80대 노인들이 일제와 6ㆍ25 전란에 얼마나 어려움을 겪으면서 조국을 일으켰는가. 우리가 흰 쌀밥을 먹게 된 동기를 한번 반성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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