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동성애자’, 신라 혜공왕
최초의 ‘동성애자’, 신라 혜공왕
  • 송종복
  • 승인 2017.07.3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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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문헌에 의하면 최초의 ‘동성애자’는 신라 혜공왕으로 꼽는다. 동성애(同性愛)란 생물학적으로 같은 성별을 지닌 사람들 간에 감정적, 이성적 이끌림 또는 성적 행위를 뜻한다. ‘게이’는 남성 동성애자, ‘레즈비언’은 여성 동성애자라 부른다. 이끌림의 유형에는 생물학적으로 같은 성(性)의 이끌림은 동성애(同性愛), 서로 반대 성에 이끌림은 이성애(異性愛), 두 성에 이끌림은 양성애(兩性愛), 모든 성에 이끌림은 범성애(凡性愛), 성적 이끌림이 없는 무성애(無性愛) 등이 있다.

 동성애자의 연인관계는 인류의 시작부터 존재해 왔으나 최근에는 정치적 환경에 맞아 떨어지고, 인구조사가 실시됨에 따라 동성애가 더욱 가시화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최초의 ‘동성애자’는 신라 제36대 혜공왕이다. 그는 여자같이 행동하고 옷을 즐겨 입었다. 신하들이 원래 왕은 여자였는데 남자의 몸을 빌어 왕이 됐으니 나라에 불길하다고 반란 중에 그를 죽였다는 설이 있다. 이 외 <향가>를 보더라도 화랑도(花郞徒)에서 동성애적 행위와 사랑이 꽤 많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31대 공민왕도 동성애자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는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해 궁녀 대신에 미남 청년들을 뽑아 그들과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즐겼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성불구자로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 <경기체가>에는 동성애의 감정을 기록한 것이 많다. 그 중 <한림별곡>에는 미소년이 관리와 같이 그네를 타고 즐기며, 남의 눈총을 보지도 않고, 둘이서 손잡고 소풍을 간다는 등 애절하며 낭만적인 노래가 많다.

 <조선실록>에는 세종대왕의 세자빈 봉씨는 세자가 자신을 돌보지 않는 처사에 분개해 후궁들과 7년 동안 동성애를 즐기다 발각돼 궁에서 쫓겨 난 적도 있다. 조선 후기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에는 청나라 상인들과 미소년들이 거래를 통해 동성애 행위를 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 자신도 청나라 문인들이 미소년을 추천해줘 은근히 중국의 동성애 풍습을 모방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또한 홍명희가 쓴 <임꺽정>에는 머슴들끼리 남색 행위가 있음을 묘사한 것이 있다. 이 밖에도 역사의 뒤안길로 간 ‘게이’나 ‘레즈비언’이 많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 와서 동성애자들이 ‘커뮤니티’를 통해 이태원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인근에 미군이 있어 미국문화의 영향 속에 이 지역은 동성애자들이 개인적인 연결 관계를 맺는 공간이 됐다. 이후 ‘게이’ 들을 중심으로 한 유흥문화가 금호동, 약수동, 종로, 신당동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70년대 말부터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시작돼 공동체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80년대 후반부터 외국인 ‘레즈비언’을 중심으로 점차 조직화되고, 1993년에는 동성애자 모임인 ‘초동회’가 조직됐다. 이후부터 남성 동성애자 모임인 ‘친구사이’, 여성 동성애자 모임인 ‘끼리끼리’가 발족됐다. 1996년 말 출범한 ‘천리안’의 동성애자 모임인 ‘퀴어넷(Queer net)’은 현재 1천400여 명에 이른다. 또한 부산지역에도 청소년 동성애자 모임인 ‘달팽이’도 40여 명의 10대들이 동성애 바로 알리기를 펼치고 있다. 성차별 속에 자신의 성(性) 지향을 외부에 알리기를 마다하는 동성애자의 국내통계는 전무한 상태이나, 외국의 통계자료를 보아 상당한 숫자가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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