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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이 힘쓰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완장이 힘쓰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7.07.27 21: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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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권력 숭배의 허망함을 꼬집은 ‘완장’은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 류한열 편집부국장
 갑질 논란이 칠팔월 더위만큼 뜨겁다.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불거지던 갑질 논란이 요즘은 감자 깰 때 한번에 딸려 나오는 감자알 같다. 갑질을 하는 ‘갑’은 자수성가했든 부모한테 재산을 물려받았든 우리 사회에서 가진 자다. 가진 자가 거들먹거리는 추태를 늘 봐 왔어 놀랄 일이 아닌데도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어렵다. ‘미스터 피자’의 갑질 때문에 열 받아 얼굴이 라지 사이즈 피자크기가 된 후 ‘총각네 야채가게’가 갑질에 뛰어들어 신선한 야채에서 썩은 냄새를 맡고 있다. 여기에 ‘신선설농탕’ 갑질까지 가세해 중복이 지난 지금 몸보신하고 싶어도 구수한 설농탕 한 그릇이 당기지 않는다.

 대체로 갑질은 프랜차이즈 본사가 가맹점 점주를 힘으로 눌러 벗겨 먹는 행태다. 갑질을 하는 프랜차이즈 대표는 신처럼 행동한다. 심지어 영업 자세를 강조한다며 점주의 따귀를 때리는 일도 있다. 힘들게 성공의 줄을 잡은 사람들이 어려웠던 시절을 잊고 사람을 존중하는 경영에서 벗어나 사람을 오직 돈벌이 수단으로 몰고 간다. 사람은 없고 돈만 있는 경영은 정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프랜차이즈 갑질에 간간히 구색을 갖추는 ‘회장님 갑질’은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는 등식을 일깨운다. 폭언과 욕설을 대놓고 하는 회장님을 태운 운전기사가 사고를 안 낸 게 천만다행이다. 외모 비하에 부모 욕까지 들은 운전기사가 겪었을 참담함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회장님이 우리 사회에 돈 가진 사람을 공공의 적으로 만든다.

 갑질은 모든 사람 안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 병리 현상이다. 누구나 갑질을 할 수 있다. 회장이 되거나 프랜차이즈 대표쯤 되면 갑질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비겁한 행동이지만 자신한테 꼼짝 못 하는 사람을 제멋대로 굴리는 재미가 괜찮을 수 있다. 물론 돼먹지 않은 사람을 국한해서 하는 말이다. 갑 자리에 앉은 사람은 을 자리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잘 모른다. 설사 안다 해도 모른 척할뿐더러 갑과 을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있는 줄 착각한다. 갑이 밥숟가락를 쥐고 흔들면 을은 꼼짝없이 드러누워야 한다. 숟가락을 빼앗기면 삶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갑은 갑이란 ‘완장’을 차면 자기가 돋보이는 줄 안다. 윤흥길이 쓴 소설 ‘완장’에서 윤종술은 최 사장한테 저수지 감시를 위임받은 동네 건달이다. 건달이 완장의 힘을 과시하며 갖은 행패를 부린다. 낚시질하던 남녀에게 기합을 주기도 하고 고기 잡던 사람을 폭행까지 한다. 심지어 자신을 고용한 최 사장 일행의 낚시도 금지시킨다. 완장 때문에 눈이 뒤집히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읍내를 나갈 때도 완장을 찬다.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권력 숭배의 허망함을 꼬집은 ‘완장’은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갑질하는 사람을 보면 꼭 완장을 차고 뻐기는 또 다른 윤종술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서글프다.

 소유욕이 넘치면 자연히 남을 짓누르고 싶은 지배욕이 생기기 마련이다. 인간의 나쁜 본능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그것이 밖으로 돌출한다. 남을 지배할 때 느끼는 순간의 쾌락과 달콤함이 눈을 멀게 한다. 끝까지 줄달음치다 추락하고 나서야 깨닫는 경우가 허다하다. 완장을 두른 갑들이 책임감을 느낄 새도 없이 오직 갑질에만 눈을 들이대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 완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듯 갑질은 우리 사회 힘없는 사람들에게 공포가 될 수 있다. 갑질은 우리 사회에서 도려내야 할 적폐다. 이 적폐를 가볍게 여기다가는 갑질의 마법에 빠진 사람을 건질 수 없다. 이들을 헛된 마법에서 깨우려면 강력한 힘을 가해야 한다. 정부가 때마침 가맹본부의 갑질을 미리 포착해 대응하려고 가맹 분야 움부즈맨을 가동한다. 옴부즈맨 활동 이후 가맹점주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한다.

 갑질의 본질은 경박한 사회에서 자기 존재감을 찾으려는 행동이다. 가진 자들은 왜 상대적으로 없는 자를 괴롭혀 더 가지려고 할까. 또한 소유에서 비교도 안 되는 ‘작은 자’의 인격까지 땅에 내동댕이치려 하는가.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데서 자기 존재감을 찾으려는 사람이 있는 한 갑질은 없어지지 않는다. 갑질의 달콤한 유혹은 쉽게 행해지고 을은 쉽게 망가진다. 갑과 을이 경제의 바퀴를 돌리는 동일체라는 생각이 없으면 을은 갑에게 당하기 마련이다.

 식탁 위에 놓인 숟가락이 금숟가락이든 흙숟가락이든 삶을 영위하는 행위는 거룩하다. 그 굽은 숟가락이 나중에 작은 봉분으로 되는 시간은 별로 차이 나지 않는다. 사는 동안 갑과 을이 나눠져 한쪽은 숟가락을 휘두르고 다른 한쪽은 숟가락을 움켜쥐는 모양이 극명하게 대조될수록 살맛이 안 난다. 갑은 조금 큰 숟가락을 들고 을은 작은 숟가락을 들고 소유욕이나 지배욕이 없는 공평한 운동장에서 뛰어야 한다. 숟가락이 크면 밥을 한 번에 조금 더 퍼먹을 수 있을 뿐이다.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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