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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水碑(홍수비)
洪水碑(홍수비)
  • 송종복
  • 승인 2017.07.12 2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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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비석은 추모비, 불망비, 선정비, 하마비 등 많지만 ‘홍수비’는 생소하다. 1925년 ‘을축년 홍수비’를 모방해 2012년 서초구 반포동 한강홍수통제소 뜰에 ‘홍수비’를 세웠다.

 비는 종류는 가랑비, 궂은비, 보슬비, 소나기, 여우비, 이슬비, 장대비, 장맛비, 진눈깨비, 폭우, 폭풍우, 호우 등이 있다. 그러나 강수량이 인적 물적 피해가 많을 때 주로 홍수라 말한다. 기록에 의한 대홍수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이다. 이때 입은 인적, 물적 피해는 단군 이래 최대의 기록으로 보고 있다. 당시의 대홍수로 희생당한 분을 추모하기 위해 이듬해인 1926년에 서울시 송파구 중대면 사무소(현: 송파동 95번지)에 ‘홍수비’를 세웠는데, 1950년 6ㆍ25 한국전쟁으로 훼손됐으나 현존하고 있다. 그런데 2012년에 그 비석을 다시 모방해 홍수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기 위해 지금은 서초구 반포동 한강홍수통제소 뜰 앞에 ‘을축년 홍수비’를 세웠다.

 이 대홍수로 사망자 647명, 가옥유실 6천호, 붕괴 1만 7천호, 침수 4만 6천호의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유실된 논은 약 3천200㏊, 밭은 약 6천700㏊이다. 즉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했다. 숭례문(남대문) 앞까지 물이 차올랐고, 교통과 통신이 전부 마비됐다. 홍수로 인해 용산의 철도청 관사는 1층 천장까지 물이 찼고, 용산역의 열차가 물에 잠겼다. 또한 뚝섬의 제방이 무너지고 샛강이 생겨 신천(新川)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도 을축년의 홍수 때문이다.

 1925년도 4차에 걸쳐 태풍과 폭우가 동시에 들어 닥쳐온 천지가 물바다가 됐다. 1차는 7월 11일, 2차는 7월 16일, 3차는 8월 초, 4차는 8월 말이다. 그 피해액만 1억 300만 원에 달했는데, 당시 조선총독부의 1년 예산의 6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차 홍수는 황해도 이남에 시간당 300㎜, 9일 후 2차 홍수는 중부지방에 시간당 650㎜의 폭우가 내렸다. 이로써 한강, 금강, 낙동강 등이 범람했다. 서울에는 한강 둑이 무너져 시내는 온통 물바다가 됐다. 서울 전역에 익사자 400명, 가옥침수가 1만 2천호다. 3차 홍수는 평안도에 폭우가 내려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이 범람했고, 4차 홍수는 남부지방에 폭우가 내려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이 범람했다.

 그중 뚝섬, 잠실동, 신천동, 풍납동의 패해가 대단했다. 조선시대에 번화한 이 일대가 대홍수로 인해 한강본류도 잠실섬 남쪽의 송파강에서 북쪽의 신천으로 바뀌었다. 반면에 2차 홍수로 땅에 파묻혀있던 풍납동 암사동의 선사 유적지가 뜻밖에 발견됐다. 이 일대가 50년이 지난 1971년 한강공유수면사업으로 잠실택지지구가 개발됐고, 1985년 가락시장이 개장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이 일대가 다시 번성했다. 따라서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50년 동안 꿈에서 깨어나 지금은 서울에서 번화가로 등장하고 있다. 대홍수가 얼마나 큰 재앙인지 ‘홍수비’가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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