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22:21 (목)
우리 사회에 정의는 어디 숨었나
우리 사회에 정의는 어디 숨었나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7.06.22 2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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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소득양극화 등 문제가 골이 더 깊어진 데에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가 큰 몫을 했다.
▲ 류한열 편집부국장
 우리 사회에 정의가 제대로 서 있는지 묻는 사람이 많다. 정의가 물처럼 흐르는 사회는 살맛이 넘치고, 정의가 막힌 사회는 죽을 맛이 넘친다. 민노총 조합원 수천 명이 서울 도심에서 1박 2일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도로를 점거한 채 ‘노동 현장 적폐 청산’ 등 구호를 외쳤다. 현장에서 나온 “재벌ㆍ권력 기관ㆍ기득권 집단을 상대로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는 말이 섬뜩하다.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의 ‘옥중 서신’이라며 소개된 ‘기득권 전쟁’은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어디로 흐르는지 모호하게 만든다.

 민노총은 어떤 조직인가. 민노총은 대기업, 고액 임금자 등을 주축으로 한 근로자 조직이다. 이들의 연봉은 1억 원에 가까이 된다. 이들이 적폐로 내모는 기득권 세력은 재벌 정도로 한정할 수밖에 없다. 임금 근로자 가운데 1억 원 이상 연봉자는 3%도 안 된다. 민노총이 시민들을 볼모로 하고 도심에서 벌이는 시위는 기득권자끼리의 전쟁이다. 생계에 허덕이는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는 ‘고래 싸움’을 보고 되레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됐다. 여기서 사회 정의는 지극히 개별적이고 자기 본위적이다. ‘이 세상에 정의가 어디 있나’라는 한탄만 키울 뿐이다.

 플라톤이 쓴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케팔로스는 ‘정의는 자신이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 소크라테스는 ‘미치광이에게 가져온 무기는 돌려주면 안 된다’며 그의 말에 반박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정의는 서로 빚진 만큼 돌려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해를 입으면 선행이 훨씬 줄어들 것’이라며 이 주장을 물리친다. 또 다른 ‘불의가 정의보다 이익이 된다’는 공격에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조화와 힘을 생산한다’고 말한다. 정의가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는 ‘국가’에서 잘 알 수 있다. 수많은 지성들이 이 책을 최고의 정치철학서로 꼽는다. 기원전 380년경에 쓰인 책인데도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정의가 힘을 못 쓰기 때문이지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에서 대화를 이어가면서 정의는 마땅한 것을 주는 행위라는 개념을 던진다. ‘마땅한 것’이 모호하고 복잡하게 들리지만 우리 사회 각 개인은 마땅한 것을 받지 않으면 부당하다고 여긴다. 국가가 완벽한 정의를 구현할 수 없는 처지에서 개인이 정의라는 바퀴가 굴러가는데 깔려 허우적대면 안 된다. 모든 사람은 같은 대접을 받아야 공정한 사회에 살면서 정의를 호흡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 기득권자가 다른 기득권자를 적폐로 몰아세우는 우리 사회에서 정의는 한낱 옛 책에 나오는 찬란한 단어일 뿐이다.

 정부는 공공부문 하반기 채용부터 블라인드(blind) 채용을 전면 시행한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는 실력을 겨룰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론이 블라인드 채용에 녹아 있다. 인재 선발 과정에서 학력, 스펙, 출신 지역 등의 활용을 배제한다. 자칫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깜깜이 채용’이 될 수 있다. 정부 조직에서 적합한 인재 선발을 위해 다양한 정보가 필요한데 이력서도 없이 뽑는다면 제대로 적합한 인재를 뽑을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정부 공공부문은 그렇다 쳐도 개인 기업은 눈감고 유능한 인물을 뽑을 수 있을 지 벌써 걱정을 하고 있다. 실력과 인성만으로 평가하는 공정한 사회를 고대하면서 채용방식을 바꾼다. 이래서 사회 정의를 앞당길 수 있으면 다행인데 눈 감고 더듬어야 정의를 만질 수 있다면 이 또한 묘한 구석이 있다.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ㆍ소득양극화 문제가 골이 더 깊어진 데에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가 큰 몫을 했다. 간혹 ‘정규직 양보론’ 같은 정의로운 말이 달콤하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길이 멀다. 소득 양극화나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기업책임론에만 목을 맬 것이 아니라 노조 측 전향적으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일방적 양보는 정의가 아니다. 정규직 양보론에 서서히 힘이 실리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대기업 정규직이 툭 하면 파업을 해 고임금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을 때 비정규직은 생계를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임금으로 배를 움켜잡는다. 이런 역설이 넘치는 우리 사회는 결코 정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 사회의 정의를 가로막으면서 정의의 수호천사처럼 행사하면 안 된다. 배부른 흥정은 가식이 쌓인 행위다. 민노총이 이번에 들고나온 사회적 총파업은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등 노조로 없는 소외계층의 투쟁을 지원하는 형식이다. 민노총이 새 정부 초기에 정부를 압박해 정치력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이 숨어있다. 가진 자가 더 가지려는 속셈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일자리까지 자식에게 세습하겠다고 요구하고 있어 많은 사람이 혀를 찼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애(仁愛)가 없어도 사회는 존립할 수 있지만 정의가 없으면 사회는 허물어진다고 했다. 정의가 물같이 우리 사회에 덮히는 날을 꿈에서만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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