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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군주 정조의 책문
개혁 군주 정조의 책문
  • 이광수
  • 승인 2017.06.14 1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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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 소설가
 조선 22대 왕인 정조는 비운의 왕손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영조임금의 미움을 사 뒤주 속에 갇혀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끝내 영조는 정조의 청을 거절했다. 영민한 정조에게 보위를 물려 줄 결심을 한 영조는 정조에게 혹독한 군주훈련을 시켰다. 정조는 죄인의 자식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왕이 되는 과정도 지난했으며 재위 중 수차례 암살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정조는 11살의 나이에 뒤주 속에 갇혀 죽임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학습과 훈련을 통해 명군주의 반열에 올랐다. 25세에 대리청정의 딱지를 떼고 보위에 오른 정조는 사색 당쟁을 혁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추진하는 등 개혁과 대통합을 위해 전력을 투구했다. 그러나 문예 중흥에 힘쓰며 수원화성을 축조한 후 자신이 꿈꿔 왔던 요순시대 같은 이상 국가 건설을 완수하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세수 48년 재위 23년 만이었다(1752-1800). 정조가 남긴 홍재전서(弘薺全書)에 실린 책문(策問)을 읽어보면 일반적으로 아는 임금이 아닌 천재적 기질이 넘쳐나는 개혁 군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던 임금이 어떻게 이런 질문을 예비관리인 대과(문과) 합격자에게 던질 수 있었는지 어안이 벙벙해진다. 정조의 책문 하나하나에는 다른 책문과 비교할 수 없는 지도자로서의 비범한 성찰과 백성을 향한 애민 정신, 민생을 향한 치열한 고뇌가 서려 있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일국의 최고지도자가 되려면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고 탐구하고 생각하면서 정책대안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책문(策問 )은 조선 시대 대과(문과)에 합격한 예비관리를 대상으로 임금이 친히 묻고 합격자가 답하는 일종의 최종면접시험이었다. 대과에 합격한 예비관리에게 시대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책문으로 묻고 들어봄으로써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관리로서의 자질을 검정하는 한편, 그들로부터 치국 대안을 듣는 민의 수렴의 소통창구로 활용했다. 책문은 그 내용도 다양했지만 대답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책문은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식견을 개진할 수가 있었다. 임금의 책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 선비로서의 곧은 절개와 패기를 보여줄 수 있었기에 크나큰 영광이었다. 이처럼 임금이 내는 책문은 그 시대상의 반영이자 임금이 꿈꾸는 치국치민의 방책을 예비관리와 함께 공유하며 토론하는 상하소통의 장이었다.

 정조임금의 78가지 책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올바른 정치를 향한 소망, 지도자의 열정과 그에 걸맞는 인재 등용, 문예 부흥으로 빛나는 문명국가 건설, 정치지침서를 통한 리더십 함양,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노력 등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신창호ㆍ정조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때마침 새 정부의 내각 구성을 위한 인재 등용 시기를 맞아 정조가 질문한 책문 중 ‘어떤 사람이건 그 사람의 재능을 사랑하라’에 대해 살펴보자. 책문의 긴 전문을 언급할 지면이 부족해 핵심만 싣는다. “내가 진정 보배로 여기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재능이다. 초야에 묻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던 인물일지라도 진실로 하나의 재주나 솜씨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추천서를 기다릴 것 없이 선발하고 싶다. 그런 인재가 혹시라도 자신의 소망을 헛되이 포기하고 타고난 분수를 다하지 못할까 염려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알차지 않은 사람을 헛되이 추천하는 일 없이 인재를 놓치지 않고 등용할 수 있는가. 화려한 이력에만 구구하게 얽매이지 않고 실제에 힘쓰는 인재를 구할 수 있겠는가. 규격에만 절절하게 굴 것이 아니라 두루 준수한 인재를 구해 훌륭하고 재능 있는 사람 가운데 빠뜨린 인재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겠는가.” 이처럼 정조 임금은 나라를 함께 다스릴 유능한 인재의 발탁을 간절히 염원하는 자신의 큰 뜻을 책문을 통해 예비관리에게 질문한 것이다. 새 내각 구성을 시작한 정부에서는 정조대왕의 책문을 통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 봉사할 참 일군의 기준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해 보아야 할 때이다.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은 케케묵은 고사성어가 아니라 국정개혁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금과옥조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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