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스콧 크리스텐슨 박사가 쓴 ‘세상을 바꾼 100가지 문서(Documents that changed the world)’에서 역경(易經: I Ching)을 첫 번째 목록에 올려놓았다. 이 책은 아마존 ‘이달의 책’에 선정됐으며 하버드, 프린스턴, 조지타운 등 아이비리그 명문대의 인기강좌로 개설됐다. 주역이 미신이라면 이런 명문대에서 인기강좌로 선정했겠는가. 이 책에서 주역(역경)은 해당 행동이 행운을 가져다줄지 불행을 가져다줄지를 알려 주지만 점술서는 아니라고 했다.
주역은 양(+)과 음(-) 2가지 기호체계로 돼 있으며 독일의 물리학자 라이프니츠는 주역에서 1과 0을 사용하는 2진법 체계를 찾아냈다. 이것은 후일 컴퓨터체계에 도입돼 디지털 문명의 도화선이 됐다. 주역이 서양(독일)에 전파된 것은 1698년 중국에 파견돼 있던 필립포 그리말디 신부에 의해서다. 그는 중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주역을 접한 후 그 오묘한 원리에 깊은 감명을 받아 라이프니츠에게 편지를 썼다. 신부의 편지를 받아 본 라이프니츠는 주역 64괘의 심오한 원리를 파악하고 2진법을 발명해 낸 것이다. 이에 전 세계 지성들이 주역 공부에 심취했다. 후에 교황의 명령으로 그리말디 신부와 함께 파견됐던 조아심 부베 신부가 본격적으로 주역연구에 몰두했다. 그리고 1830년 독일에서 주역이 라틴어로 완역돼 출판하게 됐다. 주역은 더 이상 중국의 전유물이 아니라 세계 여러 학자들이 주목하는 학문이 됐다. 물리학자 라이프니츠뿐만 아니라 닐스보어, 알버트 아인슈타인, 유가와 히데키(노벨 물리학상 수상), 존슨 얀(DNA와 주역의 관계해석), 심리학자 칼 융, 대문호 헤르만 헤세와 요한 괴테, 옥타비오파스 시인(64괘를 활용한 멕시코 시인) 등 최고의 지성인들이 주역연구에 빠져들었다. 이처럼 물리학자, 심리학자, 대문호들이 주역에 심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주역이 미신에 근거한 점술서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이런 대석학들의 혼을 쏙 뺄 수 있었겠는가. 주역은 중국의 고대 학문의 영역에 머문 주술적인 점서가 아니라 자연계를 연구하는 최고의 지침서임을 알 수 있다. 서양의 대 물리학자들이 주역을 알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세상의 지혜를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주역은 만물이 시공간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밝혀내는 학문이다. 그러나 주역은 불가근불가원의 경서라고 할 만큼 난해한 학문이다. 퇴계 이황도 20세 때 주역을 읽기 시작해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빠져드는 바람에 지병을 얻었다고 한다. 34세 때 회시(會試)에 응시해 모든 과목에서 최고점인 통(通)을 받았으나 주역 한 과목만은 요즘으로 치면 C 학점인 조(粗)를 받게 되자, 십 년이 넘도록 연구에 몰두해도 쉽게 정복되지 않는 높은 산이라고 탄식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예나 지금이나 내로라하는 학자치고 주역에 한 번 도전해 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주역은 거대한 늪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빠져들게 해 일생을 마치게도 했으니 난해한 학문임이 틀림없다.
나 역시 벽면서생인 주제에 주역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지만 그 오묘한 진리에 감탄만 연발할 뿐 의미해석의 난해성에 역부족임을 절감한다. 그러나 나는 주역의 심연까지 파고들 생각은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음과 양의 기본원리에 근거한 64괘의 표준화 된 해석을 연구하는 선에 머물고 있다. 주역 공부의 출발점인 공자의 ‘주역 계사’를 실생활과 밀착시켜 응용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쯤 하면 주역이 미신에 근거한 주술서가 아니라 만물의 원리를 해석한 경서임을 이해하리라 믿는다. 다만 주역에서 파생돼 응용되고 있는 여러 관련 역학 이론들(사주명리학, 구성기학, 육효, 육임, 기문둔갑, 풍수, 성명학 등)을 어중이떠중이 역술인들이 미신적인 주술로 오남용해 혹세무민한다는 게 문제다. 이는 위대한 경서인 주역에 대한 모독이자 자해행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