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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한 구절로 세상은 안 변한다
노래 한 구절로 세상은 안 변한다
  • 경남매일
  • 승인 2017.05.1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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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유능한 좌파가 나라살림 더 낫게 하는데 힘을 보태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에 음침한 이념의 잣대가 춤을 추지 않기를…
▲ 류한열 편집부국장
 80년대 초 대학가에 학생 데모는 흔했다. 교문 앞 바리케이드를 두고 돌이 날았고, 최루탄 가스가 부옇게 일어났다. 데모하는 학생은 독재 타도를 외치며 보도블록을 뜯어 깨 데모 진압군을 향해 던졌다. 진압군의 맑은 눈망울은 위험을 감지하고 방어자세를 취하며 간혹 입에서 심한 말을 뱉어 냈다. 학생들 입에서도 고운 말이 나올 리 만무했다. 같은 젊은이끼리 방어벽을 사이에 두고 엄청나게 다른 하늘을 머리에 뒀다.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지만 그 살벌한 현장에서는 서로 살기를 띠었다.

 그 당시 대학가는 참 묘했다. 극히 소수의 학생들이 국가 체제에 대항하며 타는 목마름을 삼키며 민주주의를 갈망했다. 5월 실록이 생명을 더할 때 대학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은 바람결 날아오는 최루탄 가스 냄새에 인상을 찡그렸다. 많은 학생들은 자신의 대학 생활이 외부 바람 때문에 날아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람이 부는 날은 흔했다. 툭하면 휴강이고 중간고사가 미뤄졌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공부하러 학교를 다니는지, 놀기 삼아 다니는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 당시 학생들이 굳이 공부하러 학교 갔다고 우겨도 나는 노는 쪽으로 몸이 기운다.

 시대의 정신은 강력한 충격을 타고 오기도 하고 사회 밑바닥에서 흐르는 작은 움직임에 담겨 흐르기도 한다. 우리는 시대마다 엄청난 힘이 역사의 물꼬를 돌려놓은 경우를 자주 봤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촛불은 우리를 막고 있던 거대한 적폐를 태우고 새 시대를 이끈 동력이라는데 눈빛이 반짝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18일 광주에서 열린 제37주년 5ㆍ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ㆍ18과 촛불정신 받들어 민주주의를 완전 복원하겠다”고 천명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 현대사에 엄청난 아픔이다. 역사적 평가를 다시 해야 하지만 숱한 생명의 희생을 오랫동안 품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5ㆍ18 기념식에서 제창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하늘 더 높이 떠올랐다.

 역사는 돌고 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9년 만에 5ㆍ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려졌다. 노래를 못 부르는 이유와 불러야만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극명하게 대립했다. 보수와 진보정권의 다른 시각에서 노래 한 소절을 함께 부를 수 없는 게 우리 사회의 얄팍한 실력이다. 우리 정치는 힘을 잡으면 상대가 쌓아놓은 웬만한 업적을 깡그리 무너뜨려야 되는 줄 안다. 돈 안 되는 이념에 머리를 돌리면 이런 줄긋기가 더 심하다. 좌파 정권이든 우파 정권이든 유능하면 된다. 다원화 사회에서 좌파나 우파가 너무 극명하게 대비되면 안 된다. 이런 진보ㆍ보수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좌와 우의 문제는 사회와 정치를 잘 돌리는 소프트웨어다. 컴퓨터 운영체제를 무얼 쓰든 화면을 잘 띄우고 프로그램을 잘 돌리면 된다. 운영체제가 무언지에 골몰하면 돌아가는 프로그램에 무관심할 수 있다.

 우파는 유능하다는 등식를 믿을 사람은 지금 없다. 좌파는 유능하지 않지만 도덕적이라고 믿는 사람도 지금은 없다. 새 정부가 지금 사회 전반에 몰고 오는 변화는 혁명적 수준이다. 조금 지나면 비정규직이 사라져 모든 근로자가 제대로 대우를 받는 행복한 나라가 열릴지도 모른다. 검찰이 제대로 개혁돼 사회정의가 반석 위에 세워질 수도 있다. 왜곡된 지난 역사가 쭉 펴져 양지로 나올 수도 있다. 국민이 잘 살고 사회 정의가 구석까지 전달된다면 좌ㆍ우를 구분하는 의미는 먼지에 쌓인 옛 이념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우리 국민은 좌ㆍ우 이분법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 자유롭지도 않다. 이번 19대 대선에서도 그 선이 분명했다. 좌파 정권을 막겠다며 국민한테 표를 호소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1등과 큰 표차로 2등을 했다. 1등이 독식하는 정치 구조에서 2등의 목소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1등이 바꾸는 세상은 9년 동안 부르지 못한 노래가 5ㆍ18 기념식에서 엄숙한 얼굴에 감동으로 찾아오고, 비정규직의 한숨이 희망으로 부풀게 한다. 백수의 절벽에 선 청년들이 웃으며 사회로 행진할 날이 곧 오리라는 기대가 넘친다. 또한 일자리가 넘쳐나 실업률이 바닥을 치는 환상을 주기도 한다. 새 정부는 이런 꿈같은 일이 이뤄질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하고 있다.

 80년대 초 대학가에 최루탄 가스가 난무하고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 가는 이유를 찾기 힘들 때 1987년 6ㆍ29 민주화 선언이 나왔다. 이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거치고 학생들이 끊임없는 민주화 요구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우리 사회를 이끈 엄청난 몸부림이었다. 그 당시 군사독재 시대에 우리는 이념이 주는 아픔의 강을 이리저리 건너다녀야 했다. 이념이 삶보다 우선하기도 했다. 그 당시 대학에서 데모를 주도했거나 아니면 도서관에서 공부했거나 모두가 사회를 변화시킨 주체들이다. 데모 주도자가 조금 더 튀었을 뿐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 기념식의 의미가 더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정권에 따라 부르고 못 부르고 하는 이상한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지금은 유능한 좌파가 나라살림을 더 낫게 하는 데 힘을 보태줘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먹고사는 문제에 음침한 이념의 잣대가 춤을 추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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