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拘置所(구치소)
拘置所(구치소)
  • 송종복
  • 승인 2017.04.1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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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拘:구-체포하다 置:치-두다 所:소- 장소

 구치소는 구속영장의 집행 받은 자를 수용하는 시설이다. 고려 때는 전옥서 또는 대리시라 하다가 조선 시대는 전옥서, 감옥, 형무소라 하며 미결수의 대기소이다.

 구치소의 이칭으로 감옥(監獄), 형무소(刑務所), 교도소(矯導所), 유치장(留置場)이라 한다. 속어로는 큰집, 학교, 국립호텔, 감방(깜빵), 빵(…)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형무소란 일본식 명칭이다. 교도소는 수형자(징역형ㆍ금고형ㆍ노역형ㆍ구류형)의 교정ㆍ교화를 위한 형사수용시설이다. 구치소는 형사 피의자 또는 피고인으로서 구속영장을 집행 받은 자를 수용하는 곳이다. 그리고 유치장은 경찰관서에 설치된 교도소의 ‘미결 수용실’에 준하는 형사수용시설이다.

 MBC에서 방영되고 있는 사극인 주말 드라마 ‘옥중화’를 보면 그 배경에 나오는 전옥서(典獄署)가 있다. 이 전옥서는 고려 때 생긴 감옥으로써, 고려 성종 14년에 대리시(大理寺)라 하다가 문종 때 전옥서로 개칭했다. 이를 충선왕 때 폐지했다가 공민왕 11년 다시 설치했다.

 조선은 태조 1년 관제개편 때 고려의 전옥서를 그대로 지속하다가 태종 14년과 세조 12년에 재정비해 <경국대전>에 법제화해 갑오개혁(1894) 때까지 존속했다. 이 전옥서 외에도 포도청(경찰청)이나 의금부(특별법정)에서 채포한 죄인을 가둬두는 별도의 감옥이 있었다. 지방에서도 감영(도청)에 딸린 별도의 감옥이 있어 죄수를 가두고 심문했다.

 조선 명종 때는 사회가 흉흉(凶凶)하자 임꺽정[林巨正]의 무리가 도성에 잠입해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는 오간수문(五間水門: 청계천의 수문)을 통해 달아난 적이 있었다. 또 일제 때 독립운동 하던 김구 선생은 ‘해주 감영’에서 감옥살이한 적도 있다. 전옥서는 서울 중부 서린방(종로구 세종로 1가 부근)에 있던 의금부 옆에 있었다. 갑오개혁(1894) 때 근대적인 법정과 재판절차가 생기면서 징역형을 받은 죄수를 가두기 위해 ‘경성감옥’을 지었다. 이를 일제가 경술국치(1910)를 계기로 ‘서대문 형무소’라 개칭했다.

 영조 때 편찬한 <속대전>에 재판의 판결을 고의로 늦추고, 죄수를 모질게 학대하는 폐단이 많아서 이를 감독하고 죄수를 보살피는 관원을 별도로 두었다. 요즘은 어떠한가. CCTV를 설치하고 밤에도 전깃불을 끄지 않고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신변을 보호하고 있다. 요즘 죄수 대우에 급수가 있다기에 그 급수는 형량인 줄 알았다. 실은 그게 아니라, 금수저를 물고 나와 꽃방석에 않은 자와 흙수저를 물고 나와 짚방석에 않은 자는 감방에서도 차별이 있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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