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20:06 (화)
빨강 립스틱 지우고
빨강 립스틱 지우고
  • 이주옥
  • 승인 2017.04.11 2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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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옥 수필가
 오랜 시간 경제 불황이 이어지고 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경제적으로 불황의 악재가 계속되면서 더불어 사람들의 심리적 위축도 심각한 수준이다. 직장은 시도 때도 없이 인원 감축 바람이 불고 직장인에게 철밥통은 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는 용어가 됐다. 청년들은 구직에 지쳐가고 기업이나 서민들은 침체된 내수에 당황하고 있다.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매출전표를 보며 절망하고 혁신적인 업무의 전산화는 사람의 할 일을 뺏고 있다. 오로지 살길은 공무원뿐인 듯 시험장엔 엄청난 청년들이 몰려들어 대학 입학 때에나 느꼈던 재수, 삼수 장수를 부추기고 있다. 청년들의 몸과 마음은 피폐해지고 무엇 하나 희망적인 것을 찾을 수 없다.

 지난 1930년대 미국 대공황기에 경제가 어려운데도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립스틱 매출이 오르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붙인 경제용어가 미니스커트 효과, 립스틱 효과다. 경제가 안 좋은 때에 그나마 적은 돈으로 자신을 꾸미며 심리적 위안을 받는 데서 나온 용어다. 근래 우리나라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중 요즘 유독 립스틱이 많이 팔리고 있다고 한다.

 립스틱은 여성을 대표하는 필수 아이템이다. 특히 빨강 립스틱이 상징하고 의미하는 것은 여성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소 사치스럽고 여유를 상징하는 여성용 화장품이 경제 실정을 대변한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극단적인 대조를 보며 우리나라 경제의 현실이 얼마나 불안한지 가늠하면서 국민들의 심리를 단편적으로 느끼게 된다. 립스틱 말고도 담배나 술 등 불황형 소비품목 매출이 늘고 있는 것도 일맥상통한 일이다.

 자신 또는 타인이 사용하거나 필요한 물품으로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고 품격을 재는 잣대를 갖는 게 문명이며 자본주의 사회다. 얼마나 좋은 물건을 지니고 사용하며 어느 정도 괜찮은 사람들과 교류하느냐에 따라 그의 가치를 판단하고 인정하는 세상이다. 위화감이나 박탈감이 드는 일이지만 냉정한 현실이다. 고급 브랜드에 집착하고 수백만 원씩이나 하는 명품 백 하나를 갖기 위한 노력을 어쩌면 이해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도 한때 명품에 대한 인식이나 소유 여부에 냉담한 의식을 가졌다. 인간에 대한 가치와 품격을 물건과 결부시켜 척도를 재는 것에 혐오감도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상에 자기의 소득에 따라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물건을 사고 더 나은 생활패턴을 갖는 것이 꼭 지탄받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다. 또한 보여지는 것에 가치를 두는 세상의 시선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일도 아니라는 것도. 인간의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자기 품위 유지비용이 비례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이어지는 경제 불황은 급기야 사람들의 소비패턴에 변화를 주고 있다고 한다. 명품은 원래 가격 1/10에 빌려 쓰고 저렴한 가격의 대용량 미용용품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언뜻 보면 실속 있고 건전한 소비패턴으로의 변화라고 환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하게 고무적이고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 그 바닥에 깔린 우울과 침체 때문이다.

 어느 사회학자가 후진국에서 부자로 사는 것과 선진국에서 가난하게 사는 것 중에 어느 부류가 더 행복한가에 대한 비교 강의를 했다. 결론은 선진국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이다. 상식이 통하고 경제가 안정된 국가의 보호 아래 사는 선진국 중산층으로서의 삶이, 다수의 불행과 부조리를 외면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후진국 부자로서의 삶보다 낫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시대적 우울과 경제적 침체의 이중고에 꽤 오래 시달렸다. 이제 바야흐로 봄이다. 화려함은 봄꽃으로 족하다. 이제 입술에 바르는 빨강 립스틱을 지우고 조금 더 힘을 내서 우리 삶의 빛깔을 열정으로 붉게 칠할 때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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