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05:29 (토)
留鄕所(유향소)
留鄕所(유향소)
  • 송종복
  • 승인 2017.04.05 1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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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留:유-머무르다 鄕:향-시골 所:소-지역

 유향소(향청)는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는 민간인이 세운 향청으로 그 장을 좌수 또는 별감이라 한다. 지방의 군ㆍ현의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기관이며 무보수이다.

 유향소를 일명 향소(鄕所)ㆍ향사당(鄕射堂)ㆍ풍헌당(風憲堂)ㆍ집헌당(執憲堂)ㆍ유향청(儒鄕廳)ㆍ유소청(鄕所廳)ㆍ향당(鄕堂)이라 한다. 이는 본래 관청으로 설립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방 군현의 업무를 일부 맡으면서 지방관청의 기구가 돼 이아(貳衙)라고 불렸다. 조선의 향리는 보수도 없고 관직[공무원]의 신분도 아니고, 오직 지방 백성들에게 토색질로 먹고살았다. 반면에 고려 시대 향리는 관직으로 외역전(外役田)을 받았으니 지방 백성들에 토색질은 하지 않았다.

 지방 사림(유림)들은 유향소[향청]을 설치해 자율적 규약을 제정하고, 그 대표로 좌수(座首), 별감(別監) 등을 선발해 조직을 형성했다. 고을에 부임하는 수령(부사, 군수, 현감)을 감시하고 때로는 보좌하며, 향리를 규찰하고 정부의 정령을 시달하며, 민정대표를 수행했다.

 유향소는 오늘날 ‘지방의회’에 비유된다. 이들은 지방에 필요한 법을 제정하고, 공무원의 부정행정을 통제하고, 청문회 등을 개최한다. 유향소[향청]은 선거를 통해 선출한 것이 아니고 저명한 사족 양반들로 구성됐다. 중앙에서 파견 온 감사나 수령은 유향소(향청)에서 근무하지는 않는다. 향리는 수령 밑에서 하부 잡무를 담당한다. 그러나 관료, 즉 공무원 신분은 아니다. 조선 시대는 ‘향직’이라 해서 대대로 세습해 그 임무를 맡았는데, 관료가 아니기 때문에 보수도 없었다. 그 대신 지방 백성들에게 토색질해 먹고살았다.

 세조 때는 유향소의 사족들이 충주의 수령을 고소하고, 그들은 권위를 남용해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에 폐지시킨 적도 있다. 지방의 간사한 아전을 견제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것은 수령이 해야 할 일인데, 유향소에다 맡긴다면 수령은 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수령을 잘 못을 챙겨 때로는 폭로하는 습성이 있으며, 백성들을 더 괴롭혔다.

 유향소(후에 향청) 사족(양반)들은 지방수령들과 결탁해 백성들은 괴롭히는 예가 너무 많았다. 심지어는 김해부(金海府)의 구암사(龜巖寺)에 시납(施納)한 노비를 추고(推考)해 속공(屬公)한 적도 있다. 이런 폐단은 양반이라 하옵시고 백성을 괴롭히는 예가 너무 많았다. 지금도 내가 양반이네 하는 자랑은 없어야 하며, 양반의 행세로 상처받은 백성이 얼마나 많은가 죄책감을 좀 가져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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