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9 20:56 (화)
복고의 창조력
복고의 창조력
  • 김혜란
  • 승인 2017.03.15 2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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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ㆍTBN 창원교통방송 진행자
 복고가 우리 문화 전반에 자리 잡은 지도 꽤 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부터 의상과 건축, 음악, 출판, 음식점 등에 이르기까지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향수에 착안해, 마케팅으로 접근한 경제적 이익 창출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당시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힘들었던 다른 상황은 기억에 없고, 그저 ‘잘 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음악업계에 바이닐 LP라는 레코드판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1분에 33과 3분의 1을 회전하는 도넛 모양의 홈이 파인 LP가 다시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LP의 향수는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이 가지고 있으리라. 지난날, 레코드판을 들을 수 있었던 전축은 그 집의 재산목록에도 윗자리를 차지했다. 청춘 시절을 전축에서 만들어 내는 레코드 LP 소리로 보냈던 사람들은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어쩌면 유물처럼 전축을 갖고 있을 것이다. 전축은 고물로 내다 버리고, 바이닐 LP 정도는 간직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것도 같다.

 이제는 마니아(?) 차지가 돼버린 바이닐이 왜 다시 고개를 들었을까. 역시 또 추억팔이인가. 40년대 말 미국에서 시작된 바이닐은 80년대까지 멋지게 시대를 풍미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작고 듣기 간편한 CD, 콤팩트디스크에 밀렸다. 국내 모든 공장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CD도 거의 사라지고 있는 음원시대에 바이닐이 돌아온 것이다. 2010년경부터 한국에 다시 등장한 바이닐은 추억 속 LP를 그리워하는 시니어들이 아니라, 10대 후반 이상의 젊은이들이 주 고객인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향수나 추억 찾기만이 아니라는 의미다. 서울에는 대형 LP 음반 매장도 생겼고 지역에는 바이닐을 통해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감상실 겸 카페, 레코드 가게도 등장하고 있다. 대기업까지도 시장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미 200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과 영국 등 서구에서는 바이닐 LP 매출이 늘었다. 2010년 들어서 급격히 상승했고, 아델이나 테일러 스위프트의 LP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는데, 지난 시절 나온 노래가 아니라 신곡 LP가 사랑받는다는 것은 바이닐 레코드 시장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왜 향수나 추억 속 LP의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 바이닐 LP에 열광할까. 레코드판의 홈이 긁히는 소리까지 들었던 사람들은 CD의 음향을 못 견뎌 했다. 깨끗한 소리였지만 속이 답답하고 뭔가 부족했다. 그럭저럭 적응하면서 LP의 기억을 잊어갈 무렵, 파일로 다운받아 듣는 음원시대가 도래했다. 놀라운 과학의 발전이었다. 젊은 세대들은 환영했다. 너무 간편했기 때문이다. 음원은 듣기 위해 주문하고 기다리는 일 자체가 필요 없었다. 바로 몇 초 만에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소지할 필요가 없었고 형체도 없었다. 아주 작은 USB에 담거나 스마트폰에서 그냥 듣고 싶을 때 듣고, 듣기 싫을 때 삭제하면 그만이다.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귀를 통한 소리이미지로 남았다.

 인간의 감각은 하나뿐이 아니다. 듣고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봐야 한다. 그래야 다양한 감각이 채워진다. 물론, 바이닐 LP 역시 2차원으로 평면이어서, 3차원과 4차원의 세계 이상은 상상의 몫이다. 하지만 음원파일은 너무 공허하다. 허공을 날아가는 파일을 끌어당겨서 들을 뿐, 만지거나 소유할 수 없다. 그러나 LP는 듣는 사람이 소리를 만들어 내는 데 참여하는 부분에 방점을 찍고 싶다. 바이닐 LP를 손으로 만지고 턴테이블에 올려 바늘을 맞춰서 음악을 들은 젊은 세대들은 뭔가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빠져든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감각으로 소리창조의 과정에 참여하는 매력일 것이다. 조부모와 부모세대가 사랑한, 물론 그들로서는 전혀 새로운 바이닐 LP의 매력을 체험하고 음원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뭔가를 얻었으리라. 살아있고 숨 쉬는 라이브현장의 감동을 오래토록 느끼고 싶어서 만든 LP의 힘을 몸으로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바이닐 LP로 만날 때만이 최상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음악형태도 더 발전된 형태로 창조되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긴다.

 창조나 창의력이 하늘에서 별안간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체험하고 축적된 것을 원료로 해서, 어떤 모티브를 통해 합하거나 연결시키고 역(逆)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차원을 달리한 해석으로 새롭게 생각하고 새로운 세상을 보는 일이다. 이전단계의 지난한 작업을 무시한다면 자가당착이다. 기본을 잊어버린 음악사랑법과 더 이상 새로움이 사라진 음악세계에 새로운 창조의 기운이 움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온 감각을 세우게 된다. 그 길목에 바이닐 LP가 임 마중 나와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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