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09:24 (금)
‘내 편 네 편’ 역사는 진보하는가
‘내 편 네 편’ 역사는 진보하는가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7.03.02 2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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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한열 편집부국장
 광장 정치가 정점에 올라섰다. 탄핵 찬성과 반대로 편을 갈라선 대치는 보기에도 위태롭다. 앞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용인되든 기각되든 후유증이 만만찮아 보인다. 탄핵 정국이 하필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거친 말은 판을 데우는 불쏘시개가 되고 있다. 이런 판국에 어느 쪽이든 탄핵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인다고 보는 건 순진한 시각이다. 국가가 운영되려면 여러 이익집단이 자신들 이익을 보려고 맞설 때 ‘규칙’을 따라야 한다. 이 규칙이 헌법이다. 결국 헌법을 따라 승복하는 성숙한 의식이 있어야 극단의 편 가르기는 멈춘다.

 제98주년 3ㆍ1절에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찬반 집회에서 태극기까지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졌다. 일제 강점기 때 겨레의 독립을 외치며 손에 들었던 태극기는 독립을 바라는 화합의 함성을 담았다. 이번 3ㆍ1절 태극기는 분열의 목소리를 담고 펄럭였다. 정치는 내 편 네 편을 따지는 놀이다. 내 편과 힘을 합해 정권을 잡고 자기들끼리 국가를 경영한다. 내 편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네 편을 웬만하면 힘을 못 쓰게 한다. 이게 냉정한 정치판의 순리다. 정치판이 만든 내 편 네 편은 국민까지 한쪽으로 내몬다. 한쪽에 속하면 다른 쪽은 무조건 맞서야 하는 대상이다. 정치인들이 이런 극단을 묘하게 만들고 있다.

 ‘내 편 네 편 신드롬’은 몹쓸 인간의 나약함에서 나온다. 사람의 DNA 속에는 편 가르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인자가 들어있다. 자기편이라고 여기면 심리적으로 편하다. 어릴 적 친구 몇 명과 손가락을 걸고 “내 편”이라고 하면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할 때 편을 먹을 수 있었다. 괜찮은 거래인 내 편 속에는 다른 친구들이 들어올 수 없었다. 어린아이가 내 편 때문에 네 편이 상처를 입는다고 생각은 할 수 없다. 내 편을 만들어 공고한 성을 쌓으면 끝내 배타성을 뚫지 못해 상처를 입은 어린아이가 지금 성인이 돼서 그 생채기를 갖고 있다면 오호통재라.

 내 편 네 편이 힘을 쓰는 현실은 마녀사냥이 통할 수 있다는 약점을 품고 있다. 유럽 중세 시대에 ‘마녀’라고 불린 사람은 국가나 교회가 볼 때는 이단자였다. 이단자란 자기가 믿는 이외의 주장이나 이론을 펼치는 사람이다. 다를 이(異)와 끝 단(端)으로 만들어진 이단(異端)의 한자 풀이는 ‘끝이 약간 다르다’는 뜻이다. 중세 때 자신들과 조금 다른 생각과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마녀’라 부르고 불태웠다. 이런 끔찍한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권력자나 기득권자에게 마녀는 몹쓸 인간이거나 기존 질서를 흔드는 네 편일 뿐이다. 마녀는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그 당시 마녀사냥으로 희생된 애매한 마녀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하찮은 도전에 맹목적인 잣대를 대 생명을 해하는 짓거리다. 이런 마녀사냥이 행태만 바뀌어 요즘도 횡행하고 있어 문제다. 인간의 근본 지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맞다. 우리는 ‘태초에 내 편과 네 편이 있었다’는 자조적인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지 모른다.

 어려운 시대에 역사책을 들추면 쓸만한 교훈을 잡을 수 있다. 조선시대 파벌싸움에서 숱한 사화(士禍)가 나왔다. 특히 1589년에 일어난 기축사화에서는 서인세력에 의해 동인세력 1천여 명이 옥에서 죽었다. 조선 500년 동안 가장 끔찍한 사건이 내 편 네 편 편 가르기에서 나왔다. 국가의 존립을 두고도 편이 다르면 생각까지 달리하는 어리석은 짓이 행해졌다. 난세에 역사가 답을 준다. 서인과 동인은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정세와 상황을 파악하는데도 엇갈렸다. 일본의 정세를 똑같이 보고 왔는데 서로 다른 보고를 하는 것은 나라보다 자기편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내 편 네 편 하다가 나라도 팔아먹을 수 있다.

 박 대통령 탄핵 사태는 엄중하다. 모든 국민이 이 사태를 주시하고 그 결과에 촉각을 세운다. 지금 광장에선 “헌법재판소의 심리 결과에 복종하는 건 북한 인민이나 다름없다”고 외치면서 군가 ‘멸공의 횃불’이 울려 퍼진다. 다른 한쪽에서는 “탄핵이 기각되면 국민 저항을 부를 것이다”고 맞선다. 현장에서는 화형식이 벌어지기도 한다. 예전 마녀사냥 때 활활 타던 불꽃을 지금도 보는 게 묘하다.

 대단한 역사가 E.H.카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대명제를 던졌다. 역사가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진보하는지 몰라도 큰길을 따라 권력욕을 뿜어내는 폭군이나 독재자가 나와 인류 역사를 뒤로 돌렸다. 폭정과 전제정치는 오늘도 팔팔하게 숨을 쉬고 있지만 정치는 나아졌다고 강변하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치가 만드는 내 편 네 편은 도저히 진보했다고 볼 수가 없다. 정치가 있는 한 내 편 네 편 가르기는 영속하리라. 우리는 역사가 뒷걸음치는 거대한 현장을 매주 보고 있다. 헌재의 탄핵 심판이 선고 난 후에도 극심한 대치를 본다면 역사는 절대로 진보하지 않는다는 데 한 표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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