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9 12:41 (화)
문화예술의 품격
문화예술의 품격
  • 김혜란
  • 승인 2017.03.01 2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ㆍTBN 창원교통방송 진행자
 설마 문화융성의 시대가 온 것일까. 이전에는 꿈도 못 꾸던 문화예술 공연과 작품을 일반서민들도 즐길 수 있는 시절이 온 것 같다. 굳이 턱이 높은 공연장을 가지 않아도 문화의 전당이나 예술의 전당급 공연을 동네에서 자주 만날 기회가 생기고 있다. 아파트 게시판이나 담벼락에, 마을에 몇 개씩 있는 평생교육센터, 도서관 게시판에는 늘 공연소식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자세히 보면 멀리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동네골목 음악학원에서도 국제급 연주자들의 콘서트를 만날 수 있다. 이전에는 음악가의 이름을 걸고 하거나, 전공자들이나 만날 수 있던 퓨전공연과 콜라보공연도 운 좋으면 즐길 수 있다.

 얼마 전 김해 장유 한 음악학원에서 만난 ‘가(歌)족 음악회’는 놀라웠다. 서너 평 남짓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과 부모들을 대상으로 국제수준의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유럽이나 동남아시아를 비롯 해금 연주자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 ‘나리’밴드의 연주였다. 해금(나리)과 바이올린(조수현), 피아노(조오령)와 색소폰(최민호)에 퍼커션(김진훈)에 마림바와 기타 타악기에 심지어 멜로디언도 등장했다. 연주곡목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탱고와 영화음악, 한국가곡에 트로트, 심지어 정악곡과 산조에 아리랑까지 총 장르를 망라했다. ‘그 정도야 뭐’ 할지도 모르지만 한 악기 연주나 같은 종류의 악기도 아니고, 다양한 동서양 악기에 맞게 새롭게 편곡해서 연주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적절하게 울림이 있는 공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수준급의 멋진 조화와 하모니를 훌륭하게 보여줬다. 콘서트 형식을 취했는데, 의상은 국립극장 수준(?)이었고 분위기는 자연스럽고 우아했다. 더 놀랄 일은 이런 형식으로 버스킹까지 계획 중이라고 한다. 올해는 길을 걷다가 몇십만 원짜리 공연의 행운을 만날지도 모르겠다.

 이런 만남의 배경을 챙겨 본다. 우선은 예술가의 마인드가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공연장소가 꼭 무대여야 한다는 것은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나리밴드처럼, 관객과 함께 연주하는 음악을 최고로 치는 예술가들이 많아졌다. 무대 위에서 군림하듯, 여봐란듯이 예술작업을 하던 당사자들이 진심을 담아 관객과 눈을 맞추고 함께 호흡하는 게 진짜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리라.

 또한, 예술과 문화를 생산하는 생산자가 많아진 현실에서도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지역만 해도 해마다 예술전공의 대학교 졸업생들이 수천 명씩 쏟아진다. 그들이 공공기관에 속하지 않고, 사적으로 예술단이나 연주단체를 만들어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만들어지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문화예술단체가 많다. 그런 여건 속에서도 갈고닦은 재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공감받고 싶은 예술가들의 욕구는 누구도 말릴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대중들과 호흡하기 위해 현장으로 뛰쳐나오는 것은 아닐까.

 어떤 시절에는 공연이란, 특정하게 환경이 갖춰진 공연장과 일정수준의 사례금이 보장되는 경우에만 하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들이 사랑하는 예술의 격을 높이고 자신들의 가치도 크게 하는 법이라고 믿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많지 않았고, 혼자 장인급 재능을 연마했다 해도 세상에 알려져야만 그 가치가 빛나는 시대가 됐다. 자신만 즐겨서는 어쩐지 도덕적(?)으로 흠이 있어 보이는 세상의 시각도 많다. 물론 숨은 고수들이 지금도 곳곳에 포진해있긴 하지만, 혼자만 하는 예술은 위험하거나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더 솔직하면 메디치 가문들도 많지 않고, 내적 운용에만 애쓰던 예술인들이 세상의 다수와 객관적 공명을 시도하는 일이야말로 밥벌이도 하고,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상식’인 시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이다.

 한편, 너도나도 비슷한 작업을 하려는 맞수들이 많다. 대다수가 같은 입장인 것이다. 자칫 땀 흘려 연습하고 연구한 작품들이 알려지지도 않고 사라질 위기이기도 하다. 이즈음에 국정농단과 블랙리스트 건으로 그 운용과 가치가 희석됐지만, 문화융성과 문화예술창조를 기치로 한 정부의 예산이 만들어졌다. 항상 질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이 정부 들어와서 문화예술인들에게 제공하는 양적인 기회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청년 예술가나 실험적인 문화예술작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출발의 문이 열린 정책도 깃털만큼은 기여했다고 본다.

 앞으로 더 척박한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물질이나 정치경제 상황이 촉촉하고 풍요로운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멀리 있어서 가까이할 수 없었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공유와 공감은 눈만 돌리면 훨씬 수월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거친 음식을 먹고 보드랍지 못한 곳에서 잠들어도, 자가치유와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문화예술의 향유는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래도록 감사하며 살 텐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