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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3ㆍ1 독립운동 돌아보다
우리 고장 3ㆍ1 독립운동 돌아보다
  • 박상호
  • 승인 2017.02.27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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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호 경남서부보훈지청 보훈과
 한민족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알린 기념비적인 민족운동인 1919년 기미년 3ㆍ1 만세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근본적인 계기가 된 한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대한민국이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이 시기야말로 우리 선조들의 3ㆍ1 독립운동 정신을 되돌아봐야 하는 때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위대한 세계사적 사건이 일어난 지 제98주년을 맞이해 우리 고장 서부경남 10개 시군의 3ㆍ1 독립운동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진주 지역의 3ㆍ1 독립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8일부터 21일까지 4일에 걸쳐 전개됐으며 특히 18일에는 진주 장날을 이용해 당시 경남도청(현 영남포정사)에 3만여 명의 시위군중이 몰려 만세시위를 펼쳤다. 기생ㆍ걸인들까지 참여할 정도로 전 민족적인 성격의 시위로서 서부경남의 대표적인 3ㆍ1운동으로 손꼽힌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현충시설로 진주 3ㆍ1운동 기념비가 진주성 내에 있다.

 통영에서는 1919년 3월 18일 관란재(觀瀾齋)라는 한문학당의 생도 20여 명의 독립 만세를 시작으로 4월 2일에는 부도정 장터(현 중앙시장)에 장날을 맞아 5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했다. 이와 관련된 현충시설은 통영의 3ㆍ1운동 기념비가 있다.

 사천에서는 곤양면을 시작으로 삼천포, 서포 등지에서 학생과 지역 인사를 중심으로 남녀노소 귀천 없이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특히 1919년 3월 21일 사천공립보통학교(현 사천초) 졸업식 축구대회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져 군중 300여 명이 사천읍으로 시위 행진했다.

 고성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0일부터 4월 3일까지 고성읍 3회, 구만면과 회화면에서 1회 모두 일곱 번이나 일어났다. 3ㆍ1운동에 참여한 고성면민은 수천 명에 달했으며 특히 3월 30일 구만면 부근에서 결집한 500여 명의 군중들은 회화면 배둔장터에서 시위행진을 했다.

 남해지역 3ㆍ1운동은 4월 2일 설천면을 시작으로 해 4월 4일에는 설천면민을 중심으로 남해군민 1천여 명이 모여 남해읍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펼쳤다.

 하동 화개에서는 1919년 4월 6일 화개면 쌍계사 승려와 학생들이 주도해 화개장날 모인 군중 2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화개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거창 가조에서는 1919년 3월 22일 가조면 장기리에서 오문헌 등 주도자들이 농민들을 규합해 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발각이 돼 일 헌병에 체포됐다. 이에 분개한 가조, 가북 농민 2천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창읍으로 행진했다.

 합천 삼가지역에서는 삼가장날인 1919년 3월 18일, 23일 2차례에 걸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삼가ㆍ쌍백ㆍ가회면과 인근 지역민 3만여 명이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는 대규모 만세운동이다.

 함양 지역에서는 3월 28일 함양장날에 군중 1천500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외쳤고 이어 4월 2일에는 규모가 커져 2천50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외쳤다.

 산청지역은 산청읍, 단성, 신등, 신안 등지에서 봉기한 수천 군중이 산청시장, 단성시장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외쳤다.

 위 언급한 지역 외에도 서부경남 각지 면 단위에서도 까지 3ㆍ1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다가오는 제98주년 삼일절, 우리 고장 3ㆍ1 운동 역사를 되돌아보며 우리 고장 순국선열의 희생을 잠시나마 되새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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