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17:02 (수)
시가 노니는 상상의 역사(4)
시가 노니는 상상의 역사(4)
  • 하성자
  • 승인 2017.02.13 2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하성자 시인ㆍ수필가ㆍ칼럼니스트

 ‘시가 노니는 상상의 역사’는 시대를 넘나드는 격조 높은 시를 통해 그 시로 역사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상상을 가미하는 작업이 되니 상상 이외의 즐거움이 있다.

 불교를 국교로 해 호국하고 번영했던 절정기를 지나 권력기강이 해이해지고 천재지변 발생으로 민심이 흉흉할 때 노래(詩)를 통해 신라민중 속으로 스며들었던 유교적 가치관의 배경을 상상해 본다. 서기 765년, 경덕왕 24년에 승려였던 충담사는 논어(論語)의 내용인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공자(孔子)의 정명(正名)사상을 즉흥시 10구체 향가(鄕歌) 속에 집어넣었다. 안민가(安民歌)가 유행함으로써 유가사상은 최고위층인 경덕왕에서부터 귀족계층을 흘러온 나라 백성들에게까지 자연스레 전이됐으리라.

 

안민가

 군은부야,

 신은애사이모사야,

 민원광시한아해고위사시지

 민시애시지고여,

 굴리질대힐생

 이지소음물생 차힐식악지치량라,

 차지힐사견지어동시거어정,

 위시지국악지지이, 지지고여,

 후구, 군여신다지민은여,

 위내시등은국악태평한음질여.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시는 어머니요 백성들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여기신다면 백성들이 사랑받는 것을 스스로 알리라.

 꿈틀대며 살아가는 서민들이 사랑을 먹어 스스로 다스려져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 나라가 보전(保全)되지 않을 것임을 알리라.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태평할 것이니라. <해석출처: 네이버-외국인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도서출판 하우>

 ‘삼국유사 권 2 경덕왕 충담사조’에 안민가의 유래가 전한다. 3월 삼짇날 경덕왕(景德王)이 귀정문 문루에서 기운 옷을 입고 차 달이는 제구가 든 통을 들고 가는 충담을 불러서 달여주는 차를 향기롭게 마신 뒤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를 노래로 지어 보라고 요청했다. 충담사(忠談師)가 즉석에서 지어 올리니 그 시가 안민가(安民歌)라고 전한다. <출처: 두산백과에서 요약>

 구구절절 직설적이며 긍정과 비판이 중의적으로 담긴 노랫말이 가히 걸작이다.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등으로 온 나라 민중에서부터 왕까지 팬이 됐으니 충담사는 요즘으로 치면 최고의 히트 송 작사가가 아니었을까. 왕이 감복해 왕사(王師)가 돼 줄 것을 청했으나 절 두 번 올린 뒤 감히 왕의 요청, 곧 명령을 단박에 거절했다고 한다. 충담사의 그 두둑한 배짱과 인품을 우러르지 않을 수 없다.

 불국사 창건과 궁궐 보수, 관리들을 단속하는 내사정전(內司正典)설치, 그곳을 감찰하는 정찰(貞察)을 두어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경덕왕은 758년, 60일 이상 휴가를 얻은 관리는 모두 해직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100년 이상 유지해 오던 관리의 월봉(月俸)을 없애고 녹읍(祿邑)을 부활했다니 고로 그 당시 신라의 국가시스템은 극도로 해이했으며 재정압박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정이나 국가가 번영을 누릴 때 매슬로우 욕구 2단계 정도에서의 개인적 불만족도는 미미할 것이라 생각된다. 살기가 팍팍하면 남 탓, 정치 탓하게 되니 어떻든 잘 살고 볼 일이다. 신라가 번성의 정점을 찍고 추락할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체제 불안까지 태동하니 그런 세태를 비꼬는 듯, 위로하는 듯, 대안을 제시하는 듯 노래(詩) 지은 안민가는 요즘에도 콕 집어 주는 무엇이 있다. 아무렴, 모두가 본분을 지켜 실천하는 가운데 국가와 개인의 발전은 가능하리라. ‘꿈틀대며 살아가는’ 여리고도 강한 국민들, 국가 번영의 촉진을 위해 더 정성스런 지도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우리 모두 ‘답게’ 한다면 대한민국은 태평할지니.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