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소원
할머니의 소원
  • 김은아
  • 승인 2017.02.06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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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아 김해여성복지회관 관장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출근한 주말. 조용한 사무실에 느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있나?” 목소리와 함께 할머니 한 분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일흔은 훌쩍 넘겼을 것 같은 할머니는 생소한 분위기에 위축이 된 듯했지만 무언가 꼭 말을 해야겠다는 듯 입을 움쩍거렸다. 하지만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여서 먼저 “어떻게 오셨어요. 할머니?” 하고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쭸다. “혹시 여기서 한글 가르쳐 주는교?” 한참을 머뭇거리던 할머니가 내뱉은 말이다. 일흔일곱의 할머니는 3년을 벼르다 용기를 냈다며 꼭 버스노선을 소리 내어 읽고 싶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3년 전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시고 나서야 한글을 배워야겠다는 용기가 났다고 했다. 하지만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누가 알 까봐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늦둥이 딸이 엄마가 글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집 가까운 곳에 있는 한글 배움터를 알아보고 엄마에게 꼭 가서 배우라고 강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쉽게 발걸음이 내딛어지지 않아 3년을 고민했다고 했다.

 결혼 전에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라서 오빠와 남동생들 뒷바라지하고 집안일을 거들어야 해서 학교를 다닐 수 없었고 결혼 후에는 사는 것이 바빠서, 자식을 키우느라 없는 살림살이 일으키느라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했다. 일을 할 때는 남들에게 야무지고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은행에서 돈을 찾을 수도 없고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줄 수 없었다는 하소연은 그 세월을 사신 많은 분들의 애환이 아니었나 싶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부(富)도 이뤘고 자식들은 ‘엄마 음식이 제일이다’, 친구들은 멋쟁이라고 하지만 글을 모른다는 것 하나 때문에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는 할머니. 죽기 전에 꼭 자신의 손으로 글을 쓰고 재미난 책을 읽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다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자신의 평생소원이 한글을 읽고 쓰게 돼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안부편지를 써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 소원 하나만 이뤄진다면 세상에 원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잠시 망설이던 할머니가 휴대폰을 나의 손에 건넸다. 손녀와 손자의 안부 문자도 있었고 광고 문자들도 있었지만 하나도 ‘읽음’이 된 것이 없었다. 글을 모르니 아예 문자는 쳐다보지도 않는다며 속상해하셨다. 특히 손자, 손녀들은 할머니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몰라 종종 안부 문자를 보내는데 할머니가 답이 없다며 투덜거린다고 했다. 그러면 휴대폰 보는 것이 서툴러 문자를 보지 못했다며 목소리가 듣고 싶으니 전화를 하라고 했지만 바쁜 중에 가끔 안부를 물어 주는 손녀의 문자에 답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한 시간을 넘어설 때쯤 책상에는 한글책이 놓여 있었다. 밀린 업무를 뒤로하고 오늘 이 자리를 올 수 있게 한 딸에게 고맙다는 문자라도 보낼 수 있게 해 드리려야겠다 싶었다.

 “가, 나, 다… 가방, 나무, 다람쥐….” 한글을 전혀 모른다고 하셨던 분이 몇 번의 읽기 연습으로 글자를 제법 읽어 내셨다. 깜짝 놀라는 나에게 경전철을 타고 다닐 때 정차역 안내방송이 나오고 스크린에 글자가 뜨면 그것을 그림으로 익혔던 것이 도움이 됐나 보다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셨다. 나의 도움을 받아 할머니는 딸에게 “고맙다”라는 세 글자의 문자를 보냈다. 한 자, 한 자 함께 공부해 나간다면 할머니의 소원은 머지않아 이뤄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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