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19:44 (목)
불공평과 친구로 살기
불공평과 친구로 살기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7.02.02 2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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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한열 편집부국장
 불공평이 세상에 공평하게 퍼져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될 때 말고는 대부분 사람은 불공평의 굴레를 쓰고 살았다. 불공평의 공격은 절대적일 수도 있고 상대적일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상대적인 불공평에 힘들어하면서 한숨을 몰아쉰다. 타고나면서 낙인찍히듯 받은 절대적 불공평은 아예 극복하기가 힘들어 체념하기도 한다. 이게 흙수저의 저주다. ‘돈도 실력이다’고 해서 보통 학생들이 열을 받고, 재벌들이 만든 천년 왕국 같은 기업을 보면 말 그대로 천년을 갈 것 같다. 서민은 철옹성을 바라보며 아웃사이더로 사는 것 같아 열받기 일쑤다. ‘누가 이 불공평의 늪에서 건져줄까’라며 주위를 둘러봐도 마땅한 구세주는 보이지 않는다.

 노동은 사람이 생활을 유지하는 근간이다. 몸을 노동판에 굴려 삶을 유지하는 일만큼 성스러운 행동도 없다. 여기서 노동판은 실제 노동을 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화이트칼라가 머리를 굴리는 사무실이 될 수 있다. 여하튼 노동판이 한쪽으로 기운 운동장이 돼 부가 쏠려 불공평은 깊어 간다. 이래저래 따지지 않고 일하면 제대로 대가라도 돌아오면 좋을 텐데, 잠깐 곁눈질하면 비정규직은 같은 일을 하고도 정규직보다 임금이 작다는 걸 안다. 비정규직이 열을 안 받을 수 없다.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을 들춰 보면 이런 불공평은 더 심화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플랫폼 비즈니스가 부를 쉽게 끌어모으고 기존 공룡 기업을 짧은 시간에 엎을 수 있어 불평등은 더 깊어진다고 클라우스 슈밥은 예견한다. 유발 하라리가 펴낸 ‘사피엔스’를 보면 바이오 기술 덕분에 인간이 업그레이드가 가능해져 가난한 자와 부자의 진정한 생물학적 격차가 생길 수 있다고 내다봤다. 부의 불평등은 나중에 영생하느냐 못 하느냐로 갈릴 수 있다는 생각은 섬뜩하기조차 하다.

 인류의 큰 역사를 더듬어보면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으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이미 BC 200년경에 왕이나 제후, 장수, 재상의 씨가 따로 없다며 봉기하는 일이 일어났다. 고려 때 만적의 난 때도 “사람 종자는 따로 없다”며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100년간 이어진 무신 시대에 70건이 넘는 민란이 일어났다. 이처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충돌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억울하면 출세하면 되는데 가진 자들이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하도록 구멍을 틀어막고 있어서 못 가진 자는 숨을 쉬기 어렵다. 그래서 봉기는 항상 잠재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항구히 누리려는 왕후장상들은 잡초처럼 보이는 아랫것들이 눈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다.

 불평등 때문에 사람들이 죽고 산다. 자본가들은 알바생들을 부리면서 쥐꼬리만한 임금을 체불하거나 열정페이를 내세워 무임금으로 일을 시키려 하는 철면피가 되기도 한다. SNS에 열정페이 피해접수가 하루에 수백 건이 넘친다. 지난해 10대와 20대 청년층 체불임금이 1천400억 원을 돌파했다. 역대 최고치다. 경기 침체로 일자리는 줄어드는데 일을 하려는 청년이 많아 업주들이 이런 사정을 노려 갑질을 하는 걸 보면 사람 속에는 상황을 맞대면 누구나 불공평을 즐기려는 DNA가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발 하라리의 말을 더 빌리면 인간(human)의 진정한 의미는 ‘호모 속에 속하는 동물’이고 호모 속에는 사피엔스 외에 다른 종들이 많이 존재했다. 인류란 표현은 ‘호모 속에 속하는 현존하는 모든 종’을 지칭하고 있다. 어쨌든 호모 사피엔스는 ‘슬기로운 사람’이란 이름으로 다른 종들을 누르고 주류 인간이 됐다. 이 인간들은 불평등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다른 종을 제치고 지금까지 유일한 종으로 군림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사피엔스들은 불평등을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허물면서 강력한 종이 됐는지 모른다.

 불공평의 굴레가 목에 한번 씌워지면 벗겨내기는 좀체 힘들다. 현실을 둘러봐도 수긍이 간다. 하지만 이 굴레가 목에 완전히 붙어 아예 떨어지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불공평은 자신의 처지를 바꿀 수 있는 디딤돌이 돼야 한다. 불공평이 사방을 에워쌀 때 몸을 거칠게 흔들어 대응하면 벽돌이 한두 장씩 무너지듯 먹구름이 걷히면 다행이다. 이런 사회는 그나마 희망이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불공평이 꽁꽁 얼어있어서 웬만한 훈풍으로는 녹일 수 없다. 불공평은 어느 나라나 사회에 존재한다. 그 강도가 문제일 뿐이다.

 인간 역사의 가장 대담한 질문은 ‘불공평은 허물 수 있다’가 돼야 한다. 그래야 내일 떠오르는 태양이 나를 위해 비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잠자리에 들 수 있다. 불공평은 사피엔스가 저항하기 쉽지 않은 친구다. 우리 나쁜 친구와 잘 사귀어 불공평의 공격을 받을 때 ‘불’ 자를 날려 공평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야 된다. 이도 저도 아니면 불공평에 기라도 꺾이지는 말아야 한다. 보통 사람이 순수하게 저주라고 받아들이면 너무 열을 받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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