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1:59 (금)
두 집단 간 벽 허물기
두 집단 간 벽 허물기
  • 김혜란
  • 승인 2017.01.18 2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ㆍTBN 창원교통방송 진행자
 어린 날 학교 운동장으로 가본다. 아이들이 놀고 있다. 편을 갈라 두 사람이 고무줄을 쥐고 높이를 달리해서 뛰어넘는다. 고무줄은 자꾸 높아지고 아이들은 열심히 다리를 들어 올린다. 까치발에 순간점프까지 별의별 방법을 다 쓴다. 그런데 편을 가르다 보니 한 아이가 남아 버렸다. 요즘이면 쉬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옛날 운동장에서는 아니다.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지만 어느 편에도 다 속할 수 있었다. 놀고 싶은 아이는 한 아이도 소외되지 않았다.

 최순실 국정 농단 관련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세간의 화제다. 사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은 블랙리스트가 아니라도, 어디서나 늘 힘들게 활동한다. 연극생활 30년인 어느 극단대표가 문화예술 종사자 모임에서 이런 말도 한 적 있다. 한 달에 100만 원만 벌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물론, 문화예술관련 사업에 정부나 지자체가 지원하는 사업들은 의외로 많다. 한동안 자격여부에 상관없이 콘텐츠가 참신하고 내용만 좋으면, 과정이 까다롭긴 해도 지원금을 받아서 문화예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제한이 생겼다. 이른바, 자격증을 가진 집단이나 협회들, 그러니까 나름대로 패를 만들어서 자신들만의 영역을 지키고 싶은 자들이 그런 처리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책 한 권을 쓰는데 지원을 받으려면 질 좋은 콘텐츠의 유무가 아니라, 시인이나 소설가, 혹은 수필가로 등단을 해서 협회에 소속이 돼야 가능한 상황이 됐다. 결국 시는 시인만 쓰는 것으로, 소설은 소설가만 쓸 때 저술활동을 보조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정리된 것이다.

 문화나 예술은 즐기는 자의 것이다. 비록 시인이나 소설가는 아니어도 자신의 문화활동과 예술활동의 결과물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답고 창의적인 내용이라면 당연히 국가의 지원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마도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는 집단이나 유사단체를 꾸려서 지원을 받게 하는 데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누리게 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필요한 의도이다. 그러나 문화와 예술 분야만큼 다양성이나 참신성에 높은 가치기준으로 두는 분야에서 일정한 자격집단에게만 지원을 주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자칫 집단에 소속된 자 외의 사람들이 함께했을 때 터져 나올 다양성을 아예 차단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콜라보’나 융합은 이제 모든 분야에서 대세다. 더욱이 그 무엇이 되든 사람이 주체다. 심지어 컴퓨터도 사람처럼 주체가 되는 세상에, 분야는 합종연횡하는데, 활동하는 주체를 제한한다면 이보다 더한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있을까. 혹여 그것이 불가능한 분야라면 작은 쪽문, 예외의 기회는 열어놔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여러 분야에서 모이고 찢기를 반복했다. 남과 북으로, 동과 서로, 보수와 진보로, 남과 여로, 부자와 빈자로, 심지어 어른과 아이로 나눠서 모인다. 이해집단은 말할 것도 없다. 모이고 나눔과 동시에, 구별을 넘어 차별하고 벽을 치기도 한다. 같은 생각과 일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하고 흡족해할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만 오래도록 기존의 누림을 이어가려 애쓰기도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들 집단과 유사한 활동을 하거나 수혜를 누리려 한다면 집단으로 경계하면서 빗장을 걸어버리기도 한다.

 대학에서 새로운 학과를 만들려면 유사한 학과에서 득달같이 반대하고 막는다는 이야기도 오래된 정설이다. 요즘 외부강사들, 겸임교수나 초빙교수들이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학생 수가 줄어드는 탓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고 한다. 교수들도 강의평가를 받는다. 학교에만 머물고 연구하는 교수들보다 외부에서 다른 활동을 겸하는 강사들의 평가가 더 좋은 경우가 있다고 한다. 외부강사들의 자리가 줄어드는 이유가 혹시 학교 안에서만 연구하는 교수집단의 경계에서 나온 현상은 아니기를 바란다. 학문과 교육이야말로 늘 흘러야 하는 분야니까….

 다시 어린 날 운동장으로 가보자. ‘이편저편’이라 불리는 아이는 양편을 오가면서 고무줄을 넘었다. 다리가 짧거나 순발력 좋지 않아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한껏 즐기고 함께 놀았다. 또한 양편의 힘이 오갈 수 있는 물꼬이자 숨구멍이 돼 줬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