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30 01:00 (토)
부끄러운 역사의 민낯
부끄러운 역사의 민낯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6.12.15 2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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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한열 편집부국장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가 쓰레기통에 들락거리기를 반복하고 있다. 역사가 신음하고 있다. 역사 대접을 소홀히 하거나 자기식으로 극진히 대접해 벌어지는 소란일 수도 있다. 경상남도교육청이 지난 14일 ‘현장교사와 함께하는 역사교육 토론회’를 열었다. 한마디로 국가가 독점하고 단일화한 국정 교과서 강행은 몹쓸 짓이다. 국정 교과서가 역사적 사실의 본질과 맞지 않다는 게 요지다. “숨어서 쓴 엉터리 교과서를 우리 아이들이 배우게 할 수 없다”는 울림은 국정 교과서가 당연히 폐기 처분돼야 한다는 이날 토론회에서 나온 ‘살아있는 역사 의식’이다.

 경남미래시민연대가 지난 10월 창원 남고등학교에서 열린 ‘교과서 세미나’에서 검인정 교과서에 거짓 역사가 많다는 여러 사례들을 짚었다. 건국 초기 제주 4ㆍ3사건,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국민보도연맹 사건 등이 공산당 폭동이나 반란인데도 사건이 미화돼 있다든가 일부 검인정 교과서는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해 우리나라를 몹쓸 나라로 기술하고, 북한을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좌 편향된 시각은 역사의 자랑스러운 부분을 빼 버리는 의도성이 깔려있다고 봤다. 검인정 역사책에는 건국 대통령이 없고 류관순 열사도 없다고 꼬집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이 책을 쓴 E. H. 카가 말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명제가 무게감을 더한다. 과거의 사실이 현재와 단절이 된 상황에서 역사의 이름에 부끄러운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사람이 많다. 결국 현재 칼자루를 쥔 사람들의 어설픈 칼춤이 역사 앞에 추악한 피를 뿜어낸다. 실제 국정 교과서 논란은 역사 해석 내용도 문제이지만 더 우선해 국가가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는 데 더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역사 내용을 밀어붙인다고 정사가 되고 뒷전으로 밀린다고 야사가 되지는 않는다. 이미 이뤄진 역사는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재해석되고 수용자에 따라 경중이 달라진다. 역사라는 거대한 강물을 잠깐 샛강으로 틀어 눈을 속일 수 있지만 원줄기는 깊게 흐른다.

 역사를 되새겨 교훈을 삼지 않는 민족은 존재할 수가 없다. 유대인들은 70년 로마에 멸망한 후 1천900년 넘게 전 세계로 흩어졌다. 오랜 가시밭길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에 의한 학살로 정점에 이른다. 유대인 600만 명이 히틀러의 광기에 죽었다. 1948년 나라를 세운 유대인들은 학살의 현장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아 아픔을 되새기며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고난의 역사를 보면서 현재와 대화하고 깊은 아픔보다 더 아픈 교훈을 뼈에 새긴다. 유대인들이 자녀들에게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도록 하는 건 똑같은 고난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과거의 고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민족은 어리석은 역사를 되풀이한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후 징비록을 써 전쟁을 대비하지 못한 조선을 꾸짖었다. ‘미리 징계(잘못을 뉘우치게 꾸짖어 경계함)해 후환을 없앤다’는 징비록을 후손들이 깊은 교훈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후 여러 전란에 휩쓸리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역사의 대가가 혹독할수록 그 교훈은 깊다. 유대민족은 주위 강대국에 휘둘리며 여러 차례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를 당했다. 노예 생활을 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짓다 귀환하면 또다시 아픔의 굴레를 벗고 예전처럼 생활했다. 역사의 가르침을 제대로 새기기는 어렵다는 교훈을 준다. 국가나 개인에게 고난은 훗날 존립과 성공의 거름이 된다. 역사에서 바른 교훈을 건져 올리기 위해서는 역사의 서술이 객관적이어야 한다. 객관적이란 이 말이 역사를 쓰는 주체에 따라 휘둘리는 게 문제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이래저래 찢겨 누더기를 걸치고 있다. 검인정과 국정 교과서가 정변을 감행해 상대를 몰아내는 형국이다. 서로 용납이 안 되는 교과서를 두고 나라 전체가 들썩거리는 모양새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현대사의 이해하지 못할 구석이다.

 병자호란 때 청군의 칼날을 피해 강화도로 가려다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는 주사파와 주화파 사이에서 고민한다. 청에 맞서 싸우자니 힘이 없고 화친을 하자니 부끄럽다. 그 당시의 정의는 모호하다. 남한산성에 갇힌 정부에게 정의를 찾는 자체가 모순이다. 하지만 치욕을 무릅쓰고 살아남는 게 정의다. 역사가 단절되면 그 외 어떤 사실도 논할 수 없다. 부끄러운 역사에서 제대로 ‘뜻’을 찾으면 훗날 치욕은 영광이 될 수 있다.

 역사교육을 놓고 토론회를 벌이는 살아 있는 역사의식은 놀랍다. 하지만 이런 토론회의 의도는 한쪽 교과서로 몰아가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역사 교과서에 해석의 차이가 아니고 거짓의 경중을 다투는 현실을 우리 사회의 편 가르기 연장선에 둬도 무방할 듯하다.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고, 종북 세력을 내몰지 못했다. 어설픈 보수와 진보의 춤사위에 이리저리 날뛰다 갈려 상대를 포용하는 배려를 잃어버렸다. 이런 터전 위에 바른 역사책이 나올 수가 없다. 한 인물의 역사적 치적은 쉽게 폐기 처분되고 또한 쉽게 날조된다. 오직 한 시각으로 관통하기 때문에 다른 시각을 섞을 수 없다. 균형 감각을 잡을 능력이 없다.

 E. H. 카의 말을 한 번 더 빌린다.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을 찾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역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역사를 쓸 수 있다.” 역사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먼저 참회록부터 써야 한다. 골통 보수도 안 되고 골통 진보도 안 된다. 이들은 이미 균형 감각을 잃어 부끄러움을 모른다. 역사 앞에 진정한 회개를 한 사람이 겸손하게 역사를 써 내려야 한다. 역사 교과서를 두고 부질없는 선택에 골몰하는 바로 지금의 역사가 한없이 부끄럽다.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이 교과서는 되고 저 교과서는 안 된다고 열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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