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되는 국정교과서가 가야 할 길
공개되는 국정교과서가 가야 할 길
  • 김국권
  • 승인 2016.11.08 2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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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국권 전 경남도의원
 지난 1945년 8월 15일 사힐린에서 훗카이도로 일본인을 후송하던 선상에서 귀국을 희망하는 우리 한국인을 산 채로 바다로 투척 했다. 이어서 소련국경과 인접해 있는 가미시스카 지역은 일본군 부대가 주둔해 있고, 제지공장과 탄광이 많은 산업적 요충지로 철도와 도로, 비행장 건설을 위해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많이 보내진 곳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패전 직전 소련군의 진격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후퇴하며 조선인들에 대한 보복이 시작됐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 조선인들은 소련군을 도울 것이다. 조선인들은 소련의 스파이다”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 그러자 1945년 8월 18일 일본 헌병들은 카미시스카 경찰서 유치장에 조선인들을 몰아넣은 뒤 불을 질렀다.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 사살했다. 피난 차량에 조선인을 탑승하게 한 후 그대로 수장시켰다는 증언, 해방의 기쁨에 만세를 외쳤던 비행장 건설 조선인 노동자들을 처형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화염살해’다.

 지난 1945년 8월 19일 미즈호마을 학살사건도 있다. 그 끔찍한 사건은 러시아 사할린 서쪽 큰 항구도시인 홈스크(마오카)로부터 내륙으로 40㎞ 정도 떨어진 포자르스코예(미즈호) 마을의 일이다. 해방 직후 소련군 병력이 도달할 당시 마을에는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남아 있었다. 예비군 훈련에 동참했던 재향군인회와 마을 청년단 소속 일본인들은 의용전투대를 결성한 뒤, ‘상부의 지시’라며 조선인 27명을 무차별 살해했다. 희생자 일부는 냉동창고에 갇힌 뒤 얼어 죽고 바다에 던져졌다. 희생자에는 부녀자 3명과 어린이 6명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현재 국내에서 영화로 제작중인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쯤. 일본 교토 북쪽 마이즈루(舞鶴) 만에 있는 작은 군항 시모사바가(下佐波賀) 앞바다에서 큰 배가 요란한 폭음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았다.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이다. 이 배는 해방 직후 고향으로 돌아오려던 조선인(7천~8천500명 예상)들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수많은 사람들은 서서히 침몰하는 배와 함께 수장됐다.

 이런 기막힌 역사적 사실을 숨기고 감추기에만 급급한 현 정부에서 탄생하게 되는 국정교과서가 오는 28일에 국정교과서의 현장검토본 내용을 인터넷에 공개한다고 예고를 했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묻어 버리고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해 친일파를 체포, 조사를 했지만 이승만의 반민특위 와해공작으로 모두 무죄 또는 병보석으로 풀려나 결국 ‘친일파로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제 말하지 않아도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국가주도의 획일화 된 역사관, 강제된 역사교육은 일제강점기의 교육과 유신독재시기의 교육이 그러했고, 독재국가 북한의 교육이 그렇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금 국정교과서의 주입시키려는 역사관의 정체가 친일미화 역사관이고 오염된 역사관을 가르치려 하기 때문이다.

 국민을 속이고, 유린하고, 무시하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행해져왔던 매국적 행위들이 친일과 독재, 부정과 부패를 철저히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과오 때문이니 이제라도 반성하고 속죄해서 후손들에게는 뒤틀린 근대사로 인해 생긴 우리 사회의 셀 수 없이 많은 부정적인 효과가 누적된, 그렇게 누적돼 만들어진 구조 때문에 생긴 현재의 시국상황.

 그 해법을 국정교과서를 말끔히 지우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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