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8:57 (금)
신문은 소설이 아니다
신문은 소설이 아니다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6.10.06 23: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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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한열 편집부국장
 신문만큼 매력적인 물건이 있을까. 이 물건에 실리는 하루 기사량이 엄청날 뿐 아니라 내용도 다양하다. 빈둥대는 사람이 마음먹고 신문을 잡으면 하루가 풍성하다. 인터넷에서 기사를 건성으로 읽기보다 애정을 담아 종이 신문을 읽으면 맛이 훨씬 낫다. 글이 다 글 같아도 신문에 박힌 글자를 읽으면 우리 두뇌가 더 활발히 움직인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우리나라 신문은 크게 진보ㆍ보수를 두둔하는 색깔을 띤다. 이 구분에 모호한 구석이 있지만 대체로 정부 비판과 옹호로 갈라진다. 신문은 새로운 뉴스를 담아 독자의 눈길을 끌지만 실제 사건을 분석하는 기사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외람된 말이지만 이슈가 되는 사안을 두고 특정 신문이 어떤 논지를 펼칠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다. 양측 구분이 쉬워 독자는 고심하지 않고 읽어내리면 된다. 여기서 독자는 중심을 잡아야 헷갈리지 않는다. 하지만 중심을 잡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읽으면 꽤 공부할 내용이 많다. ‘세상에 특정 사안을 두고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고. 똑똑한 사람 축에 끼는 논설위원이 풀어내는 기사를 읽으면서 중심을 잡지 않으면 훅하고 말려든다. 읽는 묘미는 있지만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에드워드 챈슬러가 쓴 ‘금융투기의 역사’를 들춰 보면 금융부문에서 처음에 건전한 투자심리가 나중에 광기를 띤 투기 모습으로 변한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투자를 할 때 합리적이라는 전제는 맞지 않다고 역설한다. 원래 제목 ‘Devil takes the hindmost’를 풀어보면 ‘악마는 맨 뒤 사람을 잡는다’는 말이다. 투자든 투기든 군중심리에 춤추다 근시안적 투자ㆍ투기를 하는 짓은 매우 위험하다는 충고다. 결국 뒤차를 타는 사람이 곤혹을 치른다는 일침이다. 돈을 벌기 위해 날뛰는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투자를 한다고 믿지만 살짝 뒤집어 보면 아주 형편없다. 사람들이 돈에 대해서도 이러한데 어떤 사안을 두고 자기 생각을 외곬로 빠뜨릴 가능성은 더 농후하다.

 신문을 읽다 보면 열 받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정신 차려 읽지 않으면 꼭 설득당하는 기분이 든다. 아무리 현란한 글솜씨로 기사를 엮어도 그 행간까지 챙겨 읽어야 한다. 기사를 읽으면서 어떤 저의를 깔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신문사가 특정 논지를 견지하는 건 당연하다. 또 분명한 색깔을 띠어야 독자는 신문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논지를 유지하는데 설득력이 떨어지고 무조건 한쪽으로 몰아가는 기술이 너무 저급하다. 속아도 고도의 기술에 넘어가면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 저급한 기술에 걸려 넘어지면 화가 난다. 지금 신문들은 대체로 이렇다. 여기서 말하는 신문은 중앙 일간지를 말하고 누구나 아는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선에서 이렇다는 얘기다.

 개인적으로 신문 한 부를 읽으면 책 한 권을 읽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 이 효과는 소설 한 권이 그려놓은 인간 세상을 산책한 기분과 같을 수 있다. 그렇지만 두툼한 신문 뭉치는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일단 허구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책을 읽는 사람은 소설 세상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현재의 삶에 위로를 얻거나 힘을 받는다. 신문은 사실을 담는다. 신문이 사실을 두고 생각을 달리할 수 있지만 어떤 의도를 깔고 사실을 왜곡하면 소설과 같다. 신문과 소설은 결코 한배를 탈 수 없다.

 신문이 소설과 같이 재미있으면 곤란하다. 신문은 사실을 깔고 글을 쓰기 때문에 아무리 재미있어도 소설을 넘어설 수 없다. 유혹하는 글쓰기로 독자의 마음을 잡아도 어느 정도껏 해야 한다. 고위 관리직을 낙마시키기 위해 없는 사실을 동원하면 소설이 된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상대를 무조건 공격하면 이는 신문의 바른 기능을 상실한 경우다. 심정은 가지만 증거가 없는데도 몰아붙이면 참 꼴불견이다. 이는 독자에게 강변하는 꼴이 되고 ‘무조건 믿어라’는 설교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국회의장의 중립성 논란은 여야가 끝없는 대치를 보이다 대충 봉합됐다. 국회의장의 편향성 시각은 다를 수 있다. 국회의장이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말할 수 있다는 야당이나 정치적 중립성은 국회법에 명백히 규정돼 있다는 여당이 목소리를 높였다. 신문에서도 한 사안을 두고 달리 본다. 당연하다. 하지만 다르다와 완전히 다르다는 다른 얘기다. 다른 생각을 서로 나누다 보면 어정쩡하지만 그 중간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완전히 다르면 만나봐도 더 큰 싸움만 벌어진다. 보수ㆍ진보 신문이 어떤 딴생각을 깔고 소설을 쓰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어떤 사안에 대해 옳고 그름을 떠나 물러서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부산을 뜬다. 이는 치유하지 못할 강박증이다.

 신문의 매력은 뚜렷한 목소리를 내면서 다른 목소리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두는 데 있다. 이 공간에 음흉한 뜻을 숨겨 놓기 때문에 너무 큰 한목소리만 나온다. 독창에는 합창의 하모니가 없다. 신문은 독창이 될 수 없다. 지면에는 합창이 채워지면서 주요 선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소설이 되지 않는다.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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