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21:31 (토)
다르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다르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6.08.11 2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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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한열 편집부국장
 사람은 이 세상에 수저 하나씩을 물고 알몸으로 나온다. 이 세상의 맛을 보기도 전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저를 문다. 금수저를 물든 흙수저를 물든, 혹 이것도 저것도 안 돼 수저를 물지 못한 채 태어나든 이런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큰 국가를 만든다. 우리나라 사람은 태생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치면 다른 쪽을 배려하는 마음이 별로 없다. 한창 수저론이 상한가를 치는 요즘에 생각해 보면 수저 색깔 때문에 처음부터 서로 섞이지 못하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붙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사람들이 품고 있는 생각이 서로 다른 건 지극히 당연하다. 다르기 때문에 살맛이 나기도 하고 간혹 삿대질을 해댄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수저 색깔이 다르다는 걸 깨달을 때쯤이면 우리 사회에 살 자격증을 가슴에 붙였다고 봐도 된다.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의 주장을 내세울 때 옳고 그름을 떠나 일단 밀어붙이고 보는 게 우리의 상식이다.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성숙함에서 나온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체로 우기면서 자신의 생각을 관철한다. 이런 ‘법석’이 우리 주위에 널려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THAAD) 배치를 두고 우리 사회가 극명하게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국가의 안보를 위해 반드시 사드 배치가 필요하다는 원칙에 대해 목숨 걸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야당 국회의원이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중국에 찾아가거나, 평화를 염원한다면서 미국 백악관 청원 누리집 ‘위더피플’에 사드 배치 철회 서명운동을 개설한 재미교포도 있다. 사드 배치를 두고 자기 목숨을 지켜 주는 고마운 일로 보는 측과 평화를 위협하는 나쁜 시도로 보는 측이 중간에서 만나 그 해결책을 찾기는 오뉴월 불볕더위에 하얀 눈을 보기보다 어렵다.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북한이 툭하면 미사일을 쏘아대는 환경에서도 접근하는 방법이 다르다는데 놀랍기도 하면서 탄복이 나온다.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 도발을 규탄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언론성명 채택이 무산됐다. 중국이 사드의 한반도 배치에 반대하는 문구를 성명에 포함해야 한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중국이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건 이해가 된다. 그들에게 방어용이라 강변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서울시청 앞에서 매년 열리는 퀴어축제는 많은 사람들이 볼 때는 꼴불견이다. 동성애자들이 성 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이성애자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동성애자의 수용은 지극히 개인적이 호불호의 문제이지만 서로의 다름을 수용하는 그릇에 넣기는 힘든 사안일 수 있다. 그래도 이성애자는 달리 보이는 그들을 달리 볼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동성애를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에 박수를 보내는 일을 또 다른 문제다. 다르다는 것은 인정하되 대세로 받아들이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 사드 배치와 동성애 합법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모아서 한곳에 넣어 흔들면 한 가지 시각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다름을 인정하는 데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서로 달라 반대 방향으로 치달아도 결국은 돌고 돌아서 서로 만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흔들렸다고도 제대로 돌아가고, 국가의 근간은 흔들리지 않는다. 국가 안보를 상대적인 논리로 푸는 접근을 우리 사회가 성숙했다는 징표로 삼을 수 있을 지는 헷갈리는 구석이 많다.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대는 강도가 있는데 거기에 무슨 논리가 필요할까? 일단은 칼로부터 목을 보호하는 강력한 보호대를 갖춰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 방법론이 다를 수는 있지만 보호장구를 달고 안 달고를 논의할 수 있는 우리 사회를 두고 너무 성숙했다고 보기에는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전통 가정을 흔드는 동성 간의 결혼은 자녀를 만들 수 없다. 동성 결혼이 보편화되면 인류의 종말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철없다고만 타박하기엔 찜찜한 구석이 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서로의 생각까지도 수용하는 세상은 우리 사회가 더 성숙하면 꿈꿀 수도 있다.

 다른 접근 방법을 두고 논의하면서 나은 접근 방법을 찾는 건 올바른 자세다. 독한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에도 무딘 사람이 성공하는 따뜻한 반란도 있는 법이다. 우리가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세상 룰을 살짝 뒤집어 보면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기브앤테이크’를 써 우리의 생각을 돌려놓은 애덤 그랜트는 기버(giver)와 테어커(taker)로 나눠 남에게 베푸는 자가 더 받기를 바라는 자를 이긴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자기 것만을 챙기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우의를 차지해야 하는데 상대를 돕고, 공적을 나누는 등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발상 자체가 발칙하다. 애덤 그랜트는 승자 독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미천한 우리에게 박수를 받을 만한 ‘이기는 양보’를 제시했다.

 다르다는 것은 인정하면서 그 다름을 넘어 타협할 수 없는 선도 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있어야 우리 사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래도 허물 수 없는 ‘신성한 지역’이 있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는 그런 사회가 성숙한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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