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12:04 (금)
개천에서 용이 안 나면 어때
개천에서 용이 안 나면 어때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6.07.21 2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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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한열 편집부국장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읽었다.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가운데 딱 기억나는 한 구절. “차창에 비친 가녀린 여인의 어깨.” 대충 이런 내용인데, 정확한 기억이 아닐 수도 있다. 세월이 흘러도 너무 흘렀기 때문이다. 그때 귀부인이 고급 승용차 안에서 거드름을 피웠지만 그 좁은 어깨가 나를 슬프게 했다. 그래서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내 생각의 틈에 그 귀부인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을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는가에 따라 세상은 천국이 되고 지옥이 되기도 한다. 안경을 벗어버리면 어떤 마음을 먹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삐딱하게 보이기도 하고, 똑바로 보이기도 한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은 마음이 무뎌져 웬만하면 큰 충격을 받지 않는 강심장을 선물로 받는다. 사소한 일에 놀라면 이 험한 세상에서 살기가 만만하지 않다. 늘 충격을 받지만 얼굴에 표시를 내지 않고 그 충격을 스르륵 마음 밖으로 내버리는 게 지혜다.

 지난 경남 지방의회 후반기 의장단 선거를 보면서 못내 마음이 서글펐다. 지방의 ‘어른’들이 의장 자리를 놓고 하루살이처럼 날뛰었다. 마치 내일은 염두에 두지 않고 물불 가리지 않은 작태가 우리를 슬프게 했다. 의령군의회에서 나온 ‘혈서 각서’는 개인 출세를 위해서 자리를 차치하려는 욕심에서 나왔다. 의장 자리에 눈이 멀어 욕심과 탐욕에 이성을 잃은 그 어른들에게 지방의원의 본연의 의무를 내세우는 건 쇠귀에 경 읽기도 되지 못한다. 차창에 비친 여인의 어깨보다 의원실에서 각서에 피로 지장을 찍은 의원들의 얼굴이 더 우리를 슬프게 했다. 이들은 의원실에 둘러앉아 누구를 의장으로 밀자고 약속하고 어길 때는 2억 원을 보상해야 한다는 밀약을 하고 피로 맹약을 했다. 이 정도 되면 건달의 세계에서도 약속이 지켜질 만 한데 이 어르신들은 이런 콘크리트 같은 약속도 내팽개쳤다. 이런 사람들이 완장을 차고 순진한 지역 주민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김해시의회도 돈 선거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내용을 그려보면 의장에 당선되기 위해 한 의원이 배달부를 시켜 다른 의원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단순한 구도다. 흑심을 품고 동료 의원에게 돈을 전달한 그 어른과 그 돈을 건네받은 또 다른 의원의 탐욕스러운 얼굴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돈으로 자리를 보장받으려 했다. 가진 자들이 더 가지려고 옆에 가진 자에게 돈을 주는 그들의 치졸한 리그를 보면서 한 번 더 서글퍼진다.

 요즘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 하는 세상이라고 개탄한다. 신분 상승을 위해 딛고 설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고 이 사회에 대고 욕을 한다. 이런 말을 뒤집어 보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용이 돼 하늘을 날고 싶고, 남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서라도 윗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옹골진 얼굴 표정이 떠오른다. 이런 모든 얼굴들이 우리 시대 가녀린 여인의 어깨와 같다.

 지방의원들은 바로 우리 이웃 사람이다. 그래서 정겹게 만나 손을 잡고 등을 두드릴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용이 되고 싶고, 윗분이 되고 싶어 온갖 편법을 동원했다. 개천에서 두루두루 어울려 살고, 사다리 밑에서 옹기종기 모여 웃으며 사는 게 행복이란 걸 모르는 것은 우리 사회의 허상이 팽배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번 만난 상승

 기류를 타고

 높은 세상으로

 훨훨 날고 싶으리라.

 사다리가 다른

 사람의 등짝인 줄

 알면서도

 쿵쿵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오르고 싶으리라.

 벤츠 마이바흐 S600을 타고 빗속을 미끄러져 가다 물을 튀겨 길 가던 사람이 젖어도 뒷좌석에 앉은 가녀린 여인은 그 사실을 모른다. 차 뒤꽁무니를 대고 삿대질을 해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그 여인은 손톱에 매니큐어 바르는데 신경을 세운다. 벤츠 안팎이 너무 다른 게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벤츠 바깥에 있는 사람은 벤츠를 타야 용이고 윗분이 되는 사회는 어두운 이분법 장막이 쳐져 있다는 증거다.

 경남 시ㆍ군의회 의장 선거가 의원 간 갈등과 반목으로 파열음을 내면서 주민들의 눈총을 샀다.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 용이 되고 싶은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 한 자리를 놓고 벌인 더러운 게임은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슬프다. 용이 되려다 땅에 떨어진 이무기는 물속에서 빈둥거릴 수밖에 없다. 실제 그 물속에서 살기가 좋은데 용이 되라고 부추기는 얄궂은 사회의 속임수에 많은 사람이 내몰리고 있다.

 우리와 같은 지방의원들이 벤츠를 타고 대단한 사람이 되려다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을 동원했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얼굴이 우리를 슬프게 했다. 이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의 헛꿈을 버려야 한다. 우리 사회는 게임 룰이 제대로 갖춰 있지 않기 때문에 용이 되려면 편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냥 개천에서 제대로 사는 게 더 낫다는 지극히 뻔한 소리가 우리 사회에 먹히기를 기대한다. 이 기대가 개꿈이 되면 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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