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는 집이 아니다
둥지는 집이 아니다
  • 김혜란
  • 승인 2016.07.0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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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ㆍTBN 창원교통방송 진행자
 얼마 전 뉴스를 보다가 씁쓸한 장면을 보았다. 119구조대원이 성인남성을 구조하는 장면이었다. 30대 남성이 전봇대에 올라가기는 했는데 혼자서 내려오지 못해 구조대가 온 것이다. 왜 전봇대에 올라갔을까. 전봇대 옆 길가에 까치가 한 마리 서성이고 있길래 전봇대 위쪽 둥지에 못 올라가 헤매는 것 같아서 자신이 둥지에 올려다 줬다고 했다. 까치를 불쌍히 여긴 마음이 올라갈 용기를 솟게 했지만 막상 전봇대에서 내려가려니 아찔하고 후들거렸던 모양이다.

 둥지를 지척에 두고 길바닥에서 서성거리는 까치에 대한 측은지심이 발동한 그 남성의 행동은 일단 나무랄 일은 아니다. 덕분에 혼자 못 내려와서 119구조대가 오고 언론에 노출된 일도, 살다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어볼 일은 다른 것이다. 까치가 왜 바닥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을까. 화면에 나온 크기로 봐서 아주 어린 까치도 아니었고 완전히 어른이 된 새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소(離巢) 중인 까치로 봐야 한다.

 까치는 오뉴월에 주로 이소를 많이 한다. 자랄 만큼 자라서 둥지를 떠나는 것이다. 부모까치들은 그렇게 자주 물어다 주던 먹이를 슬슬 횟수까지 줄인다. 덩치가 자꾸 자라니 먹이를 더 구해줘야 할 것 같은데 반대로 한다. 새끼 까치들이 둥지를 떠나서 독립할 때가 됐다는 의미다. 그렇게 배가 고파진 새들은 먹이를 찾기 위해 둥지를 나선다.

 한번 둥지를 떠난 새들이 다시 같은 둥지를 찾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생태의 원칙상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새들에게 둥지란 알에서 깨어나고 자라서 세상으로 나갈 때까지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쉬는 집의 개념이 아니다. 아마 전봇대 위의 둥지에 다시 올려진 그 까치는 인간 남성의 측은지심과 새의 생태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좀 황당(?)했을지도 모른다. 힘들게 이소했던 둥지를 다시 올라간 기분이 어땠을까. 인간의 무지로 인한 행동은 때때로 인간 외의 생물에게는 난감한 일이 될 수 있다.

 다시 이소를 해야 할 까치를 생각하며 인간 세상을 돌아본다. 먹이까지 줄여가면서 새끼들을 이소하고 독립하도록 만드는 조류들의 원칙이 부럽다. 조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동물들이 그런 자연의 순환원리를 이어가고 있다. 분명히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원리다. 인간도 동물이니까. 기간이 그들보다 길어서 그렇지, 부모 품에서 자라는 시기와 독립해서 스스로 살아가야 할 시기는 분명히 따로 존재한다.

 한국 사회 인간 동물들에게 지금 문제가 생겼다. 이를테면 이소(離巢)가 제대로 안되고 있는 것이다. 벼랑 끝에서 새끼를 밀어버리는 사자나, 새끼에게 먹이를 줄여가면서까지 독립하도록 만드는 새들을 본다. 그런 진정한 교육열(?)이 왜 인간에게는 없을까. 없는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고 믿는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가 어릴 때부터 그들이 원하는 거라면 모두 해 줄 작정으로 시중을 든다. 결과적으로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못 배우도록 만든다. ‘너는 공부만 해. 엄마가 다 해줄게’ 밥해다가 바치고 차에 실어다 모시고 용돈 바친다. 심지어 일할 능력이 생겨도 부모 그늘에 머물게 하면서 역시 밥 해다 바치고 이것저것 다 챙겨준다. 자녀가 스스로 살아갈 힘을 키울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미 부모 키우는 방식대로 자란 자녀들은 스스로도 툭하면 부모에게 손 내밀고 부모에게 얹혀서 살아가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결혼도 잘 하려 하지 않고 결혼 후에도 부모 집에 머물려고 하는 자녀들도 많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때가 되면 독립해야 하고 스스로 새로운 둥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도 그렇게 한다. 마치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통탄할 일은 다른 데 있다. 당신이 그렇게 키워놓고는 자식들이 부모만 바라보고 있다고 힘들다며 하소연하는 부모들이 많다. 도와주는 일과 스스로 할 기회를 막는 일을 착각한 나머지, 부모 노릇이 더 힘들어져 버렸다.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딜레마’가 왜 지금 생각날까.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 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서로 껴안으려고 했지만 가시에 찔려 그만 물러서야 했다. 그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계속 반복해서 찔려가면서 거리를 좁혀갔다. 드디어 어느 순간, 서로의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도 추위를 최대한 피할 수 있는 거리를 찾아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 부모들은 너무 올인한다. 시작은 하는데 끝내는 지점을 모르거나 무시한다. 적절한 양과 적절한 시기를 찾아내고 그 한계를 반드시 지켜줄 때, 우리 자녀들이 제대로 능력을 키워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 부모가 아무리 찬바람을 막아준다 한들, 영원히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본다면 오뉴월에 바닥에 서성이는 까치는 되도록 모른 체 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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