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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 얼굴, 호박ㆍ모개 맞나
춘향이 얼굴, 호박ㆍ모개 맞나
  • 송종복
  • 승인 2016.07.04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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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ㆍ회장
 춘향전 설화는 ‘지리산녀설화’, ‘노진의 설화’, ‘성이성의 설화’, ‘양진사설화’, ‘박색설화’ 등이 있다. 그 중 교과서에 나오는 춘향전은 ‘성이성의 설화’중에 ‘계서행록(溪西行錄)’을 변형시킨 것이다. 내용인 즉, 남원부사 생일잔치에 참석해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 운운하고 있다. 한편 ‘해동염사’나 ‘조선창극사’을 보면 춘향이는 대단한 추녀(못난이)로 나오고 있다.

 1937년 차정언(車鼎言)의 ‘해동염사’에는 남원의 관기 월매의 딸 춘향은 천하의 박색(못난이)으로, 이몽룡을 사모하다 병이 들었다. 월매는 몸종 향단이로 해금 방자를 꼬실어 이몽룡을 광한루에 유인한 후, 술을 먹여 집에 데려오게 했다. 신방에 모셔놓고는 향단은 피하고 춘향이를 잠자리에 들게 했다. 이도령이 아침에 깨어보니 같이 술 마시던 향단은 어디 가고, 호박 같고 모개 같이 못생긴 춘향이가 곁에 누워 있었다.

 이에 깜짝 놀라 뛰쳐나오니 밖에서 기다리던 월매가 일을 치렀으니 책임을 지라고하며, 동침했다는 사실의 정표(情表)를 달라고 했다. 난처해진 이도령은 자기 소매 속에 넣어 두었던 비단 수건을 정표로 주고는 그 뒤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갔다. 춘향은 이도령을 기다리다 못해 광한루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남원 사람들이 그녀를 불쌍히 여겨 이도령이 떠난 고개에다 장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오늘날 ‘박석고개’이다.

 또 일설에는 1940년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에는 남원의 어떤 늙은 기생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얼굴이 추녀였다. 그녀는 남원부사의 아들 몽룡과 남친으로 지냈는데, 뒷날 출세한 몽룡이 외면함으로 원한을 품고 죽었다. 그 뒤 남원에는 3년 동안 흉년이 들고 재앙이 왔다. 이곳 주민들이 그 흉년과 재앙은 원한을 품고 죽은 춘향의 영혼 때문이라 했다. 그때 이방(吏房)이 ‘춘향전’을 지어 춘향의 원혼을 위로하니 흉년과 재앙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박색설화’에는 남원지방에 얼굴이 못생겨 시집 못 간 노처녀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비관하며 자살해 원혼의 귀신이 됐다. 그가 죽은 뒤 새로 부임하는 부사마다 하룻밤을 지내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이다. 이는 자살한 그녀의 원혼 탓이라 해 소설을 지어 그 원혼을 위로해 주니, 그 뒤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이외도 춘향이는 이몽룡이 과거 급제해 자신을 찾아 행복하길 기다리지만, 급제한 그는 변심해 다른 여인과 인연을 맺는다는 소식에 자살을 하는 내용 등이 많다.

 여하튼 춘향전은 역대의 걸 작품이다. 첫 작품(1923)은 일인 하야가와(早川孤舟)의 무성영화로서 변사가 해설하며, 2번째 작품(1935) ‘춘향전’은 최초의 발성영화다. 3번째(1955) ‘춘향전’은 6ㆍ25전쟁으로 폐허된 문예를 부흥하는 계기가 됐고, 4번째(1958) ‘춘향전’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5번째(1961) ‘춘향전’은 많은 관심을 모았다. 6번째(1971) ‘춘향전’ 등을 계속제작 해 왔다.

 이 같은 춘향전은 신분을 타파한 자유연애와 당시 서민들의 꿈과 정서를 작품으로 보여주는 조선 소설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한국의 ‘르네쌍스’라 부르는 영조ㆍ정조 시대에 생성돼 개화기를 거쳐 현재의 춘향전으로 형성됐다고 추측된다. 그런데 작품마다 춘향이는 주로 미모의 여인을 등장시켰기 때문에 춘향은 국민적 미인으로 보는데. 이를 재조명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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