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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窟庵(석굴암)
石窟庵(석굴암)
  • 송종복
  • 승인 2016.06.15 2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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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石:석 - 돌 窟:굴 - 동굴 庵:암 - 암자

 석굴암은 ‘석불사(石佛寺)’,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 석굴암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한 때 ‘목굴암’, ‘돈굴암’이란 별칭까지 불렸다.

 석굴암은 인공적으로 석굴을 파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외국에선 대개 천연동굴을 이용했다는 점과 다르다. 그리고 공기를 잘 통하게 하고, 석굴암 바닥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도록 해 온도와 습도를 조절했다. 그 덕분에 내부 구조물이 잘 부식되지 않아 오랜 기간 보존될 수 있었다. 이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해 1995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고려 김견명(법명: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또한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석불사는 불국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점을 참작해 ‘석불사’를 ‘석굴암’으로 여기고 있다. 문화재치고 제일 만신창이가 된 것이 바로 석굴암이다. 따라서 그동안 중수, 보수 등으로 본래의 모습이 아닌 엉망진창이 된 셈이다.

 정기한의 <산중일기>에 조선 숙종 29년(1703)과 영조 34년(1758)에 보수한 흔적이 있고, 조선 말기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1909년 재발견 당시에는 본존불(本尊佛)의 코와 연대(蓮臺)가 심하게 깨져 있으며, 천장도 1/3이 무너져 흙이 흘러 내렸다. 1913년 10월에 보수공사를, 1914년 8월에 지붕해체공사를, 1915년 9월에 석굴재조립공사를, 1920년에 천장방수공사를, 또 1961~1963년에 대대적 보수공사를 했다. 2013년 11월 대좌에 균열이 생기자 또 보수공사를 해 2015년 8월 29일에 완료했다. 더 이상 보수공사가 없기를 바란다.

 1958년도 필자가 수학여행 갔을 때는 석굴암에 직접 들어가서 본존불과 11면 관음살 등을 만져도 보고 사진도 찍곤 했다. 그 후 1965년도 사학과에서 답사를 가보니 옛날의 ‘석굴암(石窟庵)’이 ‘목굴암(木窟庵)’으로, 다시 ‘돈굴암[錢窟庵]’으로 변했다. 즉, 관람객은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는데, 입구에 나무로 대문을 맞추어 출입문을 제조했으니 ‘목굴암’이 됐고, 그러던 중에 또 돈[돈-錢]을 내지 않으면 덜어가지 못하게 했으니 ‘돈굴암’이 된 셈이다.

 물론 문화재 관리를 위해서는 입장료도 필요하지만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석굴암’을 직접 보려고 간 중생에게 ‘돈’ 없이는 볼 수 없다고 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요즘은 석굴암의 보존을 위해 출입을 금지한다기에 납득은 가지마는 그 옛날 들락날락한 것이 역사라고 보니 덧없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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