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 따르면 프랑스의 Verdun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에서는 7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테일러는 저서 ‘제1차 세계 대전 (The First World War)’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 전투에서 얻거나 잃을 수 있는 ‘전략적으로 가치 있는’ 소득이란 없었다. 단지 죽어야 할 군인들과 차지해야 할 영광이 있었을 뿐이다.”
인간의 생명의 가치를 업신여기는 그러한 행위는 지금도 널리 퍼져 있다. 학자인 ‘케빈 베일스’는 최근 들어 “인구 폭발로 인해 세계의 노동 시장에는 가난하고 피해를 보기 쉬운 엄청난 수의 인력이 넘쳐 나게 됐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생명이 값싼 것이 돼 버리는” 압제적인 상업 제도 속에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 평생 힘겹게 고투해야 한다. ‘케빈 베일스’의 ‘일회용품 같은 사람들(Disposable Peo)’ 따르면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노예처럼 “돈을 벌기 위해 마음대로 쓰고 버릴 수 있는 일회용 도구”처럼 대한다고 했다.
자신이 완전히 무가치한 존재라고 느껴 절망하고 자신의 생사에 아무도 진정한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토록 많은 데에는 그 외에도 많은 이유들이 있다. 전쟁과 불공정에 더해 가뭄, 기근, 질병, 가족과의 사별 등 수없이 많은 참혹한 일들이 모든 인류를 괴롭히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전도 1:8, 14)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극심한 궁핍과 심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극심한 압박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조차도 고대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한 다음과 같은 질문에 공감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해 아래서 열심히 일하는 그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무엇을 갖게 되는가?” 진지하게 상황을 숙고해 본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많은 일들이 결국 “헛돼 바람을 쫓아다니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전도 2:22, 26.)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고작 이게 전부란 말인가?”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족장 아브라함처럼 생애에 진정으로 만족하는 가운데 삶을 마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창세 25:8) 대다수의 사람들은 삶이 공허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하지만 공허한 삶을 살 필요는 없다.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시며 사람들 개개인이 참으로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기를 바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게 될 것인지는 성경에 기록돼 있다.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할 때는 그 사람이 반드시 살기를 바라고, 미워하는 마음이 심할 때는 그 사람이 반드시 죽기를 바라니 인정이 사랑과 미움에 의혹된 사람으로 본다면 이와 같은 것이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앞서는 반드시 살기를 바라다가 곧바로 또 죽기를 바라면서,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살기를 바라는 마음과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슴속에서 교전(交戰)하는 사람은 의혹된 중에서도 더욱 의혹된 자라 할 수 있다’ 정조이산어록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