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07:42 (목)
우리 사회 ‘여성’은 없다
우리 사회 ‘여성’은 없다
  • 김혜란
  • 승인 2016.06.01 2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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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ㆍTBN 창원교통방송 진행자
 날씨는 더워지는데 자주 오싹한다. 갱년기 증상이려니 했다. 아니면 한밤중에 퇴근하는 일을 해서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내 증상이 심상치 않다. 방송일 끝내고 썰렁한 주차장에 혹시라도 다른 차가 시동 켜놓고 있으면, 헉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차 세워놓고 잠시 걷는 동안에도 걸음의 속도가 일정치 않다. 자꾸 뒤돌아보면서 빨라진다. 길 가다가 마주친 남성과는 되도록 머리 숙여 시선을 마주치지 않게 재빨리 스쳐 지난다. 노트북 작업을 하다가 문득, 인터넷에 호신용 무기를 파는 데가 있는지 검색하고 있기도 하다.

 사실 한동안 방심했다.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면서부터다. 여자는 나이 들수록 무서움이 없어진다고 했다. 길을 걷다가 목젖이 보일 때까지 큰소리로 웃기도 하고 남들 눈치 안 보고 사니 편했다. 물론 그리운 시절이 있기도 했다. 예전에는 힙합스타일로 청바지에 후드 티셔츠 옷 입고 나서면 중고생이 뒤에서 ‘저기요?’ 했던 때도 있었으니까.

 헉, 이제는 정말 그런 낭만 어린 생각을 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다. 돌아보면 그런 적은 어쩌다가 운이 좋았을 때의 순간적인 착각일뿐이었다. 모든 여성들이 지금도 사는 곳에서 전방위로 전쟁 중인 것이 현실이다.

 대로변에서 오십 대 남성이 옆에 지나가는 여성들을 향해 각목을 휘둘렀다. 이십 대와 칠십 대로 나이도 구분하지 않았다. 정신병증세에 생활고로 인한 ‘묻지 마 범죄’였다고 한다. 등산하다가 처음 만나는 사람을 죽이려고 결심한 60대 남성은 60대 등산객 여성을 살해했다. 15년 동안 강도살인죄로 복역하고 나온 사람이었다. 전문가들은 이 모든 범죄들이 딱히 여성 대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사회의 모든 약자가 그 대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여성들이 당하고 있다.

 요즘 트렌디 드라마가 재미있다. 막장 드라마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신선한 방식으로 현실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도 늘고 있다. 그런데 드라마 속 현실이 더 놀랍다. 드라마 속 젊은 여성들은 혼자 산다. 직장이 있거나 직장을 구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독립해서 혼자 사는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꽤 등장한다. 주변에도 이런 여성들이 실제로 꽤 많다. 드라마 속 이들은 자유롭긴 하지만 늘 외롭다. 하지만 요즘 모든 쇼핑의 절대다수인 택배물건이 도착하거나, 누군가 낮밤 가리지 않고 현관문 벨을 누르면 이들은 공포를 느끼고 일순 망설인다. 그리고는 있지도 않은 ‘여보야’나 ‘자기야’를 외친다. 벨 소리가 일상공포의 알리미가 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데이트하다가 혼자 사는 여성을 바래다주는 남성이 현관문 앞에서 여성의 손목을 낚아챈다. 더 같이 있고 싶어서거나 다른 볼 일이 있어서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손목이나 허리를 낚아채서 다른 곳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데이트 상대 여성에게 의견 따위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래 놓고 당황해하는 여성에게 키스를 해대거나, ‘보호해주기 위해서’라는 대사가 따라붙는다. 여성은 대충 애정표현이거니 생각한다. 이전 시대 드라마는 아예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시도 때도 없이 나왔지만, 21세기 현재 시점 드라마도 그 폭력성은 놀랍다. 그렇지만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폭력을 애정의 표현으로 착각할 만큼 폭력에 젖어있고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그동안 무심코 재미있게만 봤던 드라마들이 최근 ‘여성혐오’성 범죄들이 나오고 나서 보니, 완전히 폭력 실감, 폭력현장으로 보였다. 드라마 만드는 사람들이나 열연하는 배우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다시 보는 것이 끔찍했다. 하지만 감사하다. 눈을 뜨게 해 줘서…. 이 모든 종류의 실제 범죄와 사랑을 다룬 드라마조차도 우리 할머니, 엄마 그리고 나, 또 며느리와 딸들까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폭력을 마치 밥 먹듯이 일상공포로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와중에 화들짝 놀랄 외신이 들린다. 파키스탄에서는 아내에게 ‘가벼운 체벌’을 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이 추진되고 있다고? 그 나라도 발칵 뒤집혔다고 하니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든다. 한국 여성들과 파키스탄 여성들과 만나서 한번 이야기라도 해봐야 할까. 전 세계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모두 모으면 어떻게 될까. 아, 한자리에 다 모을 수가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오랫동안 여성해방주의자들이 주력해왔던 일이지만 너무 그들만의 노력이었나 보다. 이제는 모든 여성과 남성들이 일상의 폭력에 주목해야 한다. 교통법규 지키듯이, 하루 세끼 밥 먹듯이, 일상의 폭력을 경계할 일이다. 대체 폭력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배워야겠지만 말이다. 결국 우리 모두의 평화를 위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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