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1 01:39 (일)
눈물을 넘어서는 4월
눈물을 넘어서는 4월
  • 김혜란
  • 승인 2016.04.13 22: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ㆍTBN 창원교통방송 진행자
 선거 이틀 전 단체문자가 왔다. 회원으로 있는 한 사회단체에서 토요일에 낚시를 간다는 내용이었다. 그 단체에서 오랜 기간 준비한 행사였다. 한 달에 한번 낚시뿐만 아니라 바다를 바라보면서 대화도 하고 조선 후기 어류도감을 보면서 이백 년 전과 지금 어떤 물고기가 잡히는지도 비교해 본다고 했다. 나쁘지 않은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바로 댓글이 달렸다. ‘16일에 낚시를 하십니까? 배에서 참 많은 애들이 죽었는데ㅜㅜ….’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이 단톡방에서 퇴장해 버렸다.

 4월이다. 세월호 참사 2주기다. 2년 전 4월은 눈물로 가득했다. 세월호에서 피붙이를 잃은 사람들의 울음과 피눈물이 한반도에 흘러넘쳤다. 아마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대한민국 국민은 몇 안 됐을 것이다.

 책임 있는 정치인들도 눈물을 쏟았다. TV 화면에 비쳤던 정치인들은 눈물이 범벅돼도 카메라를 피하지 않았다. 우리 삶에서 실제로 슬픔이 밀려들면 혼자서야 펑펑 울 수도 있지만, 누군가 앞에 있다면 참으려 애쓰거나 고개를 숙이며 어떻게든 얼굴을 안 보이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화면에 눈물이 잘 보이도록 가만히 있었다. 눈물의 진정성이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다시 4월이다. 눈물을 보이던 정치인들은 어디에 있을까. 아직도 세월호로 사라진 9명은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세월호가 인양되기도 전에 진상규명 특별조사위활동은 끝나게 될 위기에 처해 있다. 정치인의 눈물은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됐다. 그때 그 눈물 흘리던 정치인들은 이 4월에 대체 뭘 하고 있을까. 선거광풍에 휩싸여 있었을까.

 벌써 2년이 지났다. 지인들은 자주 울컥거린다고 말한다. 노래방의 흥겨운 반주 속에서 문득, 처리해야 할 서류가 가득한 책상머리에서 문득, 학교 교문으로 쏟아지는 고등학생들의 활기찬 몸짓 속에서 문득, 눈물과 전혀 상관없는 순간에도 마음이 북받친다고 한다. 세월호의 죽음을 규명하지 못하는 그들 때문에 분노한다. 그리고 드라마 ‘태양의 후예’ 속 유시진 대위처럼 결심하고 말한다. “개인의 죽음에 무감각한 국가라면… (중간 생략)… 당신 조국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난 내 조국을 지키겠습니다”

 죽은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이제 정치적인 일이 돼 버렸다. 세월호 이전까지만 해도 죽은 이들의 이야기를 더 열심히 들으려고 애를 쓰는 일은 그저 전통이고 인간으로서의 의무 같은 거였다. 그러나 세월호 이후는 달라졌다. 이윤을 내지 못하면 전부 관심 대상에서 제외되는 세계 경제 질서를 비롯, 우리 사회의 몇몇 질서에도 저항하는 일이 돼 버렸다.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의 이른바 ‘존치교실’ 문제는 회의를 거듭하고 있다. 416가족협의회는 존치교실은 그대로 두고 부족한 교실을 증축할 것을 주장하고, 교육청과 재학생 학부모 측은 존치교실을 재학생교실로 환원하고 유품은 추모관 건립 때까지 별도공간에 둘 것을 제안했다. 교육청은 그렇다 치고 재학생 학부모들은 왜 그럴까. 아닌 말로 존치교실이 아이들 진학에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닐 텐데, 무슨 마음일까.

 경남지역 67개 시민단체는 ‘세월호 참사 2주기 창원추모위원회’를 구성했다. 촛불문화제와 추모 문화제 등 행사를 준비했고 진행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다시 한 번 추모의 마음을 모으고, 기억하고, 약속하고, 행동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만든 일이다. 창원과 김해, 거창, 양산, 진주 등 경남의 13개 시와 군에서 세월호 추모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이제 그만하라, 잊으라’는 분위기는 정말 삼가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단순히 ‘476명이 탄 배가 침몰한 사건’으로 남기려는 자들을 주시해야 한다. 세월호는 경고였다. 이 나라에서 이런 사건을 이 정도로밖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경고였다. 잊지 않겠다는 추모의 감정을 넘어서서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공유해야 한다. 다시 몸서리가 쳐진다. 첫날 탈출한 승객 외의 구조자 숫자는 ‘0’이었다.

 낚시 모임도 감정적으로 외면할 일은 아니다. 또 다른 바다에서 망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해 내야 한다. 팽목항과 단원고뿐만 아니다. 일터와 노는 공간, 그 어디서든 2년 전 닥쳤던 불행을 수시로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또 다른 세월호를 대비하는 일이, 잊는 것보다 몇천 배는 더 중요한 일이다. 돌아오지 못한 자들과 죽은 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남겨진 우리라도 살아남고 증언해야 하니까.

 시인 엘리어트 데려오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4월은 차고 넘치도록 잔인한, 눈물의 달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