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0:51 (금)
장사도 소통이지 말입니다
장사도 소통이지 말입니다
  • 김혜란
  • 승인 2016.04.06 2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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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ㆍTBN 창원교통방송 진행자
 5일장을 자주 이용한다. 먹을거리를 주로 사는데, 대개는 신선하고 상인과 눈 마주쳐 가면서 흥정하고 이야기도 할 수 있어서 간다. 장사도 소통이다.

 이맘때면 꼭 사 먹는 것이 있는데 짭짤한 맛 나는 토마토다. 이 봄에 잠깐만 나오고 들어가 버린다. 그런데 올해는 일단 실패인 것 같다. 두 번 샀는데 두 번 다 아니다. 그 품종과 겉모습만 비슷한 설익고 작은 토마토들이 섞여 있다. 서글프다. 이제 이것만큼은 대형매장을 가든지, 이름 걸고 파는 인터넷으로 주문해야 할 모양이다. 눈 마주치고 이야기도 하고 사는 일이 훨씬 좋은데….

 우리 동네 5일장은 두 종류가 있다. 1일, 6일장과 3일, 8일장이다. 1일장에서 미처 놓친 것을 3일장에 가서 찾으면 몇몇 상인들을 거기서도 만날 수 있다. 이런 상인들의 물건은 거의 질이 동일하다. 서로 알아보고 덤을 얹어 주기도 하고 다른 것을 더 사기도 한다. 뭐랄까, 서로 간에 작은 신용이 생긴 것이다. 물건이 안 좋아 보이면 대놓고 물어도 본다. 오늘은 왜 이러냐고. 그러면 이러저러해서 그렇다고 하면서 설득하려고 애쓴다. 절반은 변명이지만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의 입장과 처지를 알게 되고 한 번씩 양보한다. 떼쓰면 더 주기도 하고 모른 척 주는 대로 받아 오기도 한다. 얼굴 마주 보고 사고파는 행위로써 서로의 약점을 덮어가며 소통하는 것이다.

 5일장에 오는 상인들도 층이 있다. 5일장이지만 전국으로 다니는 상인들도 있는 모양이다. 경남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도 간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런 상인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표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하다. 마치 강호의 무사들 같다. 필시 자신의 물건에 대해서 자신감도 있고, 좀 모자라도 억지로 팔려고 하지 않는 자존심이 있어 보인다. 또 밝은 표정이지만 훈련받은 서비스를 하지 않는다. 입이 귀에 걸리게 과장 되게 웃거나 ‘고객님, 손님’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둘째, 피곤해도 인상을 쓰지 않는다. 하루 종일 한 데서 사람들 상대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잠시 물건 둘러보고 사는 것도 피곤한데, 그 사람들을 면대 면으로 상대하다 보면 예사 체력으로는 힘들 것이다. 지켜보니, 식사도 대충 때운다. 물건 팔아가면서 밥 한 공기 비우는데 열 번 스무 번도 넘게 일어섰다 앉았다 한다. 그래도 물건 사는 사람들에게 인상 써봤자, 매상에 좋지 않은 영향만 줄 거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한 것인지, 웃지는 않더라도 인상은 반듯하게 펴고 장사한다.

 셋째,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대단히 중요한 부분인데, 눈을 피하지 않는다면 물건을 믿어도 된다는 뜻이다. 때때로 협상에서 전략상 일부러 상대방의 눈길을 피하거나 할 때도 있지만, 5일장에서 그런 협상 전략을 써야 할 경우는 거의 없다. 눈을 마주치면서 거래하는 순간에 신용이 쌓여간다.

 눈을 피하면서 말하는 상인의 물건은 열 중 아홉은 물건에 하자가 있거나 뭔가 숨기거나 비싸게 받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들은 5일장에서도 뜨내기들이 대부분이다. 되도록 뜨내기 상인에게서는 사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가끔은 구미가 당기는 물건이 있어서 사야 할 때 참 망설여진다. 신용이 없기 때문이다.

 대형매장은 판매자의 얼굴을 마주 보고 물건값을 흥정할 수 없다. 시계 없고 창문 없는 거대한 장소에서, 오너의 최대한 이익을 위해 마케팅 담당자가 기획한 상품 진열대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한껏 이미지만 가득한 유혹을 하거나, 살 테면 사고 싫으면 말라는 듯, 거만 떨면서 줄지어 서 있는 물건들은 주섬주섬 주워 담아야 한다. 겨우 계산대에서 박봉에 시달리면서 거짓 미소로 무장하거나, 무심한 표정으로 계산기만 두드리는 캐셔들과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신용은 오로지 물건만으로 결정되고, 살 수 있는 곳이 대형매장 말고는 없어서 가기도 하는 곳이다.

 일본의 유명한 오사카 상인들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노렌’을 지킨다고 한다. 즉, 입간판 같고 상징 같은 ‘노렌’은 ‘신용’을 의미한다. 5일장에 가면 물건을 직접 만들지는 않지만 얼굴 마주 보고 흥정하면서 세상도 이야기하며 쌓아가는 21세기 한국스타일의 ‘노렌’, 즉, 인간미 넘치는 ‘신용’의 싹을 발견할 수 있다.

 짭짤한 토마토를 어디서 사야 할지 아직도 궁리 중이다. 5일장에서 땀내 나는 상인들 얼굴 마주 보고 흥정하면서 사고 싶은데,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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