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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慶宮(창경궁)
昌慶宮(창경궁)
  • 송종복
  • 승인 2016.03.30 2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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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昌:창 - 번창하다 慶:경 - 경사나다 宮:궁 - 집

 일제는 민족정기를 말살키 위해 ‘궁’에 동물을 키워 ‘창경원’이라하며, 동물서열로 내려 깎고, ‘궁내‘에 벚꽃을 심고, 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해 민족정기를 꺾었다.

 창경궁은 세종대왕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고자 1418년에 지은 수강궁(壽康宮)이 그 전신이다. 여기엔 아픈 사연이 많다. 임란 때는 전소된 적이 있고, 이괄의 난과 병란 때에도 화를 입었다. 숙종 때는 장희빈, 영조 때는 사도세자 사건도 창경궁 뜰에 묻혀있다. 원래는 수강궁인데, 9대 성종(1484)은 이곳에 삼전(三殿: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을 짓고, 대비(조모, 모친, 숙모)를 편히 모시기 위해 이름도 창경궁이라고 개칭했다. 궁궐의 구조는 크게 외전, 내전, 후원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아무래도 여자인 세 대비를 위한 궁이다 보니 외전보다 내전을 더 크게 지은 것이다.

 창경궁은 ‘경사가 가득한 집’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그와 반대로 1909년 일제에 의해서 준공된 조선왕조의 비극적 현장이기도 했다. 사도세자(이선)가 아버지(영조)의 미움을 사 뒤주에 갇혀 죽는 장소가 창경궁이었다. 또한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 장소이기도 하고, 특히 임란 때 전소된 것을 광해군 때 다시 재건했고, 그 후 인조와 순조 때도 큰 불이 발생하기도 했다.

 일제는 조선정기를 말살하기 위해서 창경궁을 훼손했다. 1909년 3월 25일 궁 안에 식물원을 만들고 일본식 정자를 지어 꾸몄다. 그 후 1911년에는 창경궁의 ‘궁(宮)’을 ‘원(苑)’으로 격하시켜 ‘창경원’이라고 불렀다. 일본 국화인 벚꽃나무를 가득 심어 1924년 밤부터 벚꽃놀이 장으로 시작했다. 밤에는 연인들의 데이트 장으로, 휴일에는 동물들의 재롱놀이 장으로 타락되고 있었다. 또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해 도로를 설치했다.

 이어 궁중에 전국의 기형적인 동물을 모아놓고, 또한 국왕도 을사조약[착취조약]을 맺을 때의 마음과 맺고 나서 마음이 다르다고 해 조선국왕을 기형동물과 같이 놀게 했다. 외국인이 우리의 왕궁을 둘러보고는 모두가 끽끽하는 모습이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왕궁에 동물이 놀이한다는 것이, 조상의 모독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에 1981년까지 역사의 아픔이 국민의 웃음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여기에 민족의식과 국가의식이 태동해 1983년에 동물을 과천대공원으로 쫓겨내고 벚나무도 꺾어 버렸다. 일제가 부르던 ‘창경원’도 다시 ‘창경궁’으로 조선왕조를 재건했다. 다시는 이곳에서 벚꽃놀이나 동물사육을 하는 바보 같은 민족은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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