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5:37 (금)
김육의 정치 소신과 삶
김육의 정치 소신과 삶
  • 박태홍
  • 승인 2016.03.21 2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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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홍 본사 회장
 정국이 어지럽다. 한마디로 말하면 난세다. 여ㆍ야 공천권을 둘러싼 잡음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20여 일 남은 19대 마지막 국회 일정도 잡질 못하고 있다.

 여ㆍ야를 막론한 정치권은 무엇을 얻어 내려고 이토록 진흙탕 쌈박질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입만 열면 민생경제와 청년 일자리 창출 등을 외쳐대던 정치권이 4ㆍ13 총선 국회의원 공천권을 두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정국을 자임하듯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여ㆍ야 모두 마찬가지지만 야당보다 정권을 쥐고 있는 여당이 더욱 심하다.

 새누리당 공천권 갑질은 도를 넘어 당헌 당규의 기준도 인간관계의 인정도 눈물도 명분을 앞세운 원칙도 없는 듯하다. 국민과 약속한 상향식 공천은 온데간데없고 정권유지 차원의 미운 사람 고운 사람을 가려내는 듯한 행태의 공천이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시장 내의 잡상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상도의가 있고 이를 지켜나가려고 하는데 이 나라를 짊어지고 나가야 할 정치지도자들 즉 새누리당의 친박계로 불리워지고 있는 공관위가 국민들이 이해 못 할 갑질 공천권을 행사하고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공관위의 부적절한 공천심사에 대해 오랫동안 침묵하다 주호영, 이재오, 진영의원 등을 비롯한 8곳의 공천탈락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며 당 대표로서의 권한을 토대로 못마땅하다는 속내를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칼자루를 쥔 공관위의 이한구 위원장은 김 대표의 의견을 무시, 당내 갈등만 부추기고 있는 형국이다.

 옛말에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지만 작금의 정치 현실을 볼 때 어느 한 사람 영웅 근처에도 가는 사람이 없는 듯해 실로 안타깝기만 하다. 국회의원 후보를 탈락시킨 사람이나 탈락한 사람 모두가 명쾌한 행동 하나 없고 이 당 저 당으로 옮겨가거나 대부분 무소속 출마를 고집, 개인의 안위와 영리, 명예만을 앞세우는 듯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김육은 1580년 선조 13년에 태어난 참 지식인이자 반듯한 정치가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김육은 선조, 광해, 인조, 효종에 걸쳐 네 사람의 임금을 모시고 관리생활을 하며 조선의 정치를 해왔다. 김육은 선조 38년(1605년) 사마시에 응시 합격하면서 문묘종사, 의금부도사, 음성현감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 홍문관 사간, 충청감사, 동부승지, 형조참의, 홍문관부제학, 개성유수,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까지 오르며 조선시대의 지방과 중앙정치를 두루 섭렵한 인물이다. 당시의 시대 배경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면서 나라의 존폐위기와 함께 조선왕실과 관리 사대부들은 물론 백성들의 생활 자체가 피폐하기 짝이 없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김육은 오로지 백성을 잘 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만 평생을 바친 의지의 행정가이자 정치가였다. 이 때문에 네 명의 임금을 모시면서 세 번의 정권이 뒤바뀌었지만 한 번도 귀양을 가지 않은 조선조의 유일한 정치가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사대부는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끈도 고쳐 매지 않는다’는 원칙을 평생 고수해 온 김육은 관리생활을 하면서도 몸가짐을 반듯하게 해왔다. 나라에서 받은 녹봉의 대부분은 민생구휼을 위해 사용했으니 집안 형편은 말할 수 없는 경제적 고통이 뒤따랐다 한다. 때문에 김육은 우의정이던 71세기까지도 한성에 집 한 칸이 없어 셋집에 살았을 정도로 평생을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 당시 정승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채, 안채 등이 있는 삼칸 솟을 대문이 있는 큰집에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려온 사람들과는 극히 대조적이랄 수 있다.

 김육은 백성을 위해 대동법 시행을 주장했다. 대동법이란 물품으로 내던 곡물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면적에 따라 쌀이나 무명 등으로 대신해 납부하는 조세제도를 말한다. 대동법시행은 김육의 주장대로 광해군 때는 일부 경기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됐고 인조 때는 강원도까지 포함됐다. 그러나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고위 관리들이 이를 반대했다. 결국에는 평생의 숙원이었던 대동법의 전국시행을 끝내보지 못하고 김육은 79세를 일기로 효종 9년(1657년) 세상을 떠났다.

 김육은 대동법을 비롯한 역법, 농사법, 조운법 등을 시행했으며 화폐주조기술을 이용, 활자를 만들었다. 이렇듯 김육에 의해서 제안되고 만들어진 모든 제도는 가난하고 힘없는 국민들을 위해서였다. 이 같은 그의 관직 생활은 타의 모범이 됐고 후세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그가 평생을 살면서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은 하늘과 외적 그리고 백성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백성만 안정시킨다면 멀리 있는 다른 두 가지의 두려움은 자연적으로 해소된다고 했다.

 작금에 들어 조선시대의 정치가 김육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 나라 정치인 모두가 김육의 정치 소신과 삶의 철학을 한 번쯤 되새겨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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