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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에서
둘레길에서
  • 정창훈 기자
  • 승인 2016.03.09 2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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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훈 편집위원
 길은 떠나기 위해서도 돌아오기 위해서도 존재한다. 떠나고 돌아오는 반복이 인생이다. 만남과 이별은 길에서 이뤄진다. 그 길 위에 우리는 살고 있다.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은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야 하고 길을 찾아도 없으면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최근 뉴스나 신문에서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둘레길이 조성되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2015년 전국 지방자치단체 또는 민간단체에서 나름의 의미와 목적을 두고 조성한 둘레길이 약 550여 개이며 세부 코스별로 나누면 1천400여 개나 된다고 한다.

 주로 산의 둘레를 따라 일주하는 여행길이 일반적이지만, 산이 아닌 도심을 도는 둘레길도 있다. 그 둘레길에는 북한산, 지리산, 남한산성, 송악산, 가덕도, 제주도, 부산 둘레길 등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ㆍ역사자원을 특성 있는 이야기로 엮어 국ㆍ내외 탐방객이 느끼고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걷기중심의 길’인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를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지난 2013년에는 서울 마포의 마포 난지생명길, 인천 웅진의 백령구경길, 경기 포천의 포천 한탄강 어울길, 전북 김제의 아름다운 순례길, 전남 신안의 가거도 샛개재길과 진도의 진도 아리랑길, 경북 상주의 성주 가야길, 진주의 비단길 등을 조성했다.

 제주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길이 있다. 큰길에서 집까지 이르는 골목을 의미하는 제주어인 올레길은 놀멍(놀면서), 쉬멍(쉬면서), 걸으멍(걸으면서) 마음을 치유해 주는 길이다. 나는 이 길을 걸어보지 못했지만 제주올레길과 흡사한 일본의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를 걷게 됐다.

 우리 역사와 연관성을 지닌 흔적에다 제주에서 접할 법한 풍광을 동시에 체험하는 일석이조 여행의 묘미는 남달랐다.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나? 나에게 올레길은 무엇일까? 내 안에 잠재돼 있는 큰길에서 골목길로, 다시 골목길에서 큰 길로 걷고 싶은 강한 욕망이었을까.

 걷는 것은 체력과 시간 등 여러 필요충분조건이 맞아야 할 수 있다. 아울러 의미 있는 길이면 더욱 좋지 아니한가. 의미 있는 길에서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 아마 대자연은 그런 공간과 기회를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제공하고 있다. 걸으면서 사색도 한다. 새로운 것을 보며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신비로운 세상을 가슴으로 느낀다. 그것이 살아가는 맛이다. 내가 걷는 이유다.

 올레길 코스는 대부분 길이가 15㎞ 이내이며, 평균 소요시간이 4~6시간 정도이다. 15개의 규슈 올레길 중에서 난이도가 낮은 가라쓰 코스는 거리가 11.2㎞이다.

 올레길의 표식과 안내판은 길을 따라 걷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잘 연결돼 있다. 리본이 없는 길을 5분 정도 걸었다면 되돌아와야 한다.

 리본은 나무, 전봇대, 울타리 등에 다양하게 걸려있다. 벽면, 돌, 담벼락, 도로바닥에는 페인트로 그려진 형태도 볼 수 있으니 갈림길에서는 화살표식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천천히 길을 걸어야 한다.

 둘레길을 걷는 것은 산행이나 마라톤을 달릴 때처럼 앞만 주시하면서 결승점을 향해 가는 경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둘레길은 바라보고 사색하고 대화하고 즐기면서 걷는 도보여행이다. 길에서 많이 쉬고 길을 완주한 시간이 길수록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추억을 가슴에 담고 가는 길이 될 것이다.

 가라쓰 코스에서 400년이 넘게 사람들이 오고가던 구시미치 숲길을 지나면서 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에 들렸다.

 박물관 입구에는 우리나라 북제주군에서 가져왔다는 돌하르방이 서 있었다. 안내 데스크 바로 옆에는 전남 해남에서 가져왔다는 나무 장승인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전시관에는 신라 금관과 금동미륵보살 반가상의 모조품이 전시돼 있다. 작은 글씨로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라고 적어 둔 안내문과 함께 전시실 중앙에는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의 모형도 놓여 있다. 박물관에서는 조선통신사 행렬도와 반가사유상 등을 상설전시물도 볼 수 있어 과거 한일교류 역사를 알 수 있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면서 한일우호 교류를 목적으로 한 전시라고 하지만 한ㆍ일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기초 지식이 없는 방문객들에게 그곳에 전시된 우리 문화재들이 모두 일본 것으로 착각하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안고 길을 재촉했다.

 길은 그 위를 걷거나 달리거나 이동하는 나름의 형태로 펼쳐져 있다. 어느 길이든 순탄한 길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길을 두려워하면서도 길을 찾고 있다. 가끔 길 위에서 방향을 잃고, 길이 나를 버린 듯 원망하지만 결국 나만의 길을 찾게 된다.

 보이는 길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길도 있다. 내가 찾아 헤맨 것은 나 자신이었다.

 바람과 파도가 영혼까지 맑게 해준다는 제주바다와 아름다운 제주올레길, 세상에서 가장 길고 사색적인 스페인 산티아고 길, 가장 높고 신비한 히말라야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 100곳의 한 곳이라도 걷고 싶다. 언제든지 푸른 땀을 흘리러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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