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조선총독부는 남대문을 보물 1호로 지정했다. 1962년에 일제의 지정을 답습해 그대로 보물 1호를 국보 1호로 재지정했다. 이유는 일본 황태자가 통과한 문이란다.
조선 초 사대문은 흥인지문(동)ㆍ돈의문(서)ㆍ숭례문(남)ㆍ숙정문(북)이 있었다. 그중 숭례문(崇禮門)을 남대문이라고 한다. 1396년(태조 5년)에 최유경이 축성했고 1447년과 1479에 개축했다. 다른 대문의 현판은 가로로 달았으나 숭례문만 세로로 달았다. 그 이유는 관악산의 화기에 대응하기 위해 현판을 특이하게 세로로 만든 것이다.
남대문(南大門) 편액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의하면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이 썼다고 하나 이설이 많다. 그 이유는 1929년 9월호 <별건곤>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다. 중종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고 남겨져 있다. 또한 김정희의 <완당전집>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신장의 글씨라고 적혀 있으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고, 그 액자는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한다.
일제는 1916년에 조선총독부에서 고적조사위원회 설치하고, 1934년에 숭례문(남대문)을 보물 1호로, 흥인지문(동대문)을 보물 2호로 지정했다. 이유는 일제가 1907년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 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다.
2002년 2월부터 숭례문 근접 관광계획을 불허했다. 그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같이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된 것을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을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2008년 2월 10일 채종기의 방화로 불탔다. 화재가 났을 때 급한 것은 ‘숭례문’ 현판이다. 급히 떼는 과정에서 38조각이 났으나 즉시 문화재청으로 이송돼 거의 보존 처리해 2009년 7월 3일에 완전히 복원되고, 2013년 5월 4일부터 숭례문을 개장하고 있다.
일제는 조선의 궁궐과 성곽을 파괴했으나, 임란 당시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통과했다는 가치를 두어 이를 보존하고 또한 조선인에게 남쪽의 귀한 손님(일본인)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남대문을 보물1호(후에 국보1호)로 일제가 자기 위주로 지정한 것이다. 지난 1996년에 1호를 변경하자는 여론이 돌았으나 유야무야됐다. 지금이라도 다시 변경해 일제의 잔재를 없애고 민족의 정기를 받을 만한 것을 국보 1호를 지정함이 옳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