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10:25 (토)
불황에 사라져가는 품앗이
불황에 사라져가는 품앗이
  • 허균 기자
  • 승인 2015.11.24 2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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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균 제2사회 부장
 수년 전 늦가을이라는 뜻의 ‘만추’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딱 이맘때다. 여름을 지나 겨울의 길목에 선 지금, 조금은 뜸했던 지인들의 경조사 소식이 몰려올 시기다. 아니나 다를까 가깝게 지내는 한 지인이 다음 주 휴일 결혼을 한다는 연락을 전해왔다.

 마흔을 넘어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무슨 결혼이냐는 마음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재혼이란다. 경기불황이 장기화되고 있는 지금, 무턱대고 들려오는 지인들의 경조사 소식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다. 엉덩이로 딱 붙어버린 지갑의 얄팍함 탓이다. 지인의 경사에 함께 즐거워하기보단 부조를 얼마나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입 밖에 내기 힘들 정도로 부끄러운 이야기다.

 예부터 경조사를 알리고 지인들에게 십시일반 돈을 받는 것은 서로 돕는다는 마음에서 기인됐으리라. 농경사회를 살면서 우린 두레와 품앗이 이름의 미풍양속을 지키며 살아왔다.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웠던 풍속이다.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는 두레가 공동적 내지 공동체적인 것이라고 하면, 품앗이는 개인적 또는 소집단적이라는 인상이 짙다. 결국 도움을 도움으로 갚아야 한다는 일종의 증답의례적 사고방식이 제도화된 것이 품앗이다. 우리 조상들은 목돈이 들어가는 가정의 대소사를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 품앗이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모심기, 김매기, 길쌈 등의 시기에 노동을 나누는 두레와 품앗이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조상님들은 이를 잘 활용해 가정의 대소사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극심한 경기불황과 날로 확산되는 개인주의는 품앗이 개념으로 지인들의 어려운 시기를 도왔던 관혼상제의 예를 사라지게 하고 있다.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돈가뭄에 주머니 푼돈이 아쉬워진 요즘 직장인들은 행여 지인들로부터 결혼소식이나 아이의 돌 등 가정의 행사소식이 들려올까바 노심초사하고 있다.

 “너의 집안 대소사에 나를 찾지 말아 달라”는 어느 직장인의 우스갯소리는 딱 내가 하고픈 말이기도 하다.

 이 나라 경제가 불황의 늪을 헤쳐 나오지 못하자 대소사에 지인들을 초청하는 사람들도 고민을 하긴 마찬가지라고 한다. 연락을 하자니 괜스레 미안하고 하지 않자니 뭔가 개운치 않기 때문이다.

 통신수단이 극도로 발달된 요즘에는 인쇄소를 찾아 인쇄물을 만들지 않고도, 우체국을 찾아 우편물을 발송하지 않고도 휴대전화를 이용, 다수에 연락이 가능해 졌다. 연락의 수단은 예전에 비해 훨씬 수월해졌지만 경기불황과 개인주의의 확산은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든 것이다.

 “남편의 친구들이 아이의 돌잔치에 아무도 오지 않아 친구들에게는 남편이 학교를 외국에서 나왔다고 변명을 했다”며 쓴웃음을 짓던 한 주부의 말에 웃음을 내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경기불황으로 예로부터 이어져 왔던 품앗이가 없어진다니 서글프다”는 어느 대학교수의 말에 공감이 간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의 위력은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는 매일매일 실감하고 있다.

 하지만 경기불황으로 아름다웠던 우리의 품앗이 미풍양속까지 사라져 간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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