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05:30 (토)
백년해로와 죽음
백년해로와 죽음
  • 정창훈 기자
  • 승인 2015.11.11 2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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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훈 편집위원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불가에선 죽음을 ‘입적’, ‘열반’, ‘해탈’이라 하고, 가톨릭은 ‘선종’, 기독교에서는 ‘소천’이라고 한다. 사람의 죽음에 대해 가장 흔한 말은 ‘사망’이고 윗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는 말을 ‘별세’, ‘운명’, ‘작고’라고도 한다.

 그래서 죽음과 관련된 말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어해 ‘하늘소풍’ ‘아름다운 마무리’ 같은 은유적인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을 떠올린다고 죽음이 다가오는 게 아니고, 죽음을 자신의 삶에서 최대한 멀리 미뤄둔다고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다스릴 권능을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인간이 자기의 죽음을 다스릴 수도 있어야 하지만 죽음은 항상 삶을 따라 다닌다. “오늘을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고 한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우리에겐 언제나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이 다르겠지만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는 사람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것만은 분명하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언제든 죽음이 다가올 수 있다고 믿고 준비하는 마음을 가져야 좀 더 의미가 있는 삶이 될 것 같다.

 미국의 결혼식에서 신랑신부는 “죽음이 그대를 갈라놓을 때까지…”라고 시작하는 혼인서약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죽을 때까지 해로하는 부부는 5쌍 중에 2쌍에 불과하단다.

 누구나 행복한 결혼을 꿈꾸며 결혼을 하지만 어떤 부부는 백년해로를, 어떤 부부는 원수처럼 지내거나 이혼을 한다. 행복한 부부관계는 그렇지 않은 부부보다 평균 4년을 더 산다고 한다.

 오랫동안 치매로 고생하시던 장모님이 지난 4월에 돌아가시고 3개월 후에 장인어른도 장모님을 따라 가셨다. 부부가 한날한시는 아니더라도 같은 시기에 함께 묻히기를 바라는 것은 금실 좋은 부부의 소박한 소원일 것이다.

 한국 속담에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되도록’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부가 한번 인연을 맺으면 죽을 때까지 같이 사는 것을 행복한 삶으로 간주한다. 보통 백이라는 숫자는 자연수 100을 가리키지만 때로는 많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백년해로(百年偕老)는 ‘시경’의 ‘격고’에 나오는 이야기다. ‘격고’는 고향을 등지고 멀리 떨어진 전장에서 아내를 그리워하는 한 병사가 읊은 애절한 시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고향에 돌아갈 때만 손꼽아 기다리는 병사의 심정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전장에서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면서 하염없이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며, 생이별을 참고 견디어야 하는 병사의 심정은 가슴 아프기 그지 없다.

 문학에서는 이것을 지고지순의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영원한 사랑, 지순한 사랑에 대한 향수는 사랑의 의미가 혼탁하게 변질된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속에 각별하게 다가온다.

 우린 영원히 살 것처럼 살지만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장인 장모님은 회혼식을 기념하는 예식은 없었지만 회혼식 이상의 은혜로운 삶과 백년해로를 하셨다.

 회혼식은 결혼한 지 6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는 예식이다. 결혼 20주년은 도혼식, 25주년은 은혼식, 50주년은 금혼식 등으로 이름을 붙여 기념하는 것은 가정이 그만큼 소중하므로 성실히 책임감 있게 지켜내라는 뜻일 것이다. 더구나 회혼식은 자녀 중에 아무런 사고가 없어야만 가질 수 있는 인생 최대의 축복이다.

 자녀들이 분가하고 빈 둥지에 노년의 부부가 하나 돼 서로의 삶에 버팀목이 돼주고 온전히 상대방의 생활에 함께하는 것은 그렇게라도 자신의 사랑과 관심을 쏟을 대상을 찾아야 살아있다는 의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기억에 남았던 대사가 있다. “할아버지, 먼저 가거든 좋은 곳에 자리 잡아두고 얼른 나를 데리러 와요. 혼자 오래 남겨두지 말고”라는 할머니 말이 떠오른다.

 오랜 세월 금슬이 좋았던 남편이 먼저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는 것은 그를 천당에 가서 빨리 만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받아 줄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대상이 사라지면 존재감을 잃게 된다.

 언제가 됐든, 자신의 세상이 무너져 버리고, 외톨이라 느끼고, 좌절하고 표류하는 것처럼 느낄 때가 분명히 찾아온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아무도 피해 갈 수가 없다.

 의사인 니컬러스는 그의 저서 ‘행복은 전염된다’에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해 인간관계의 생성과 작용의 원리를 파헤치고 있다. 그는 직업상 말기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배우자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주는지 지켜봐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의 건강은 상호 연결돼 있는 것 같았다. 아내가 병에 걸리거나 죽으면 남편도 곧 죽음을 맞이할 위험이 상당히 높음을 발견한 것이다.

 부부가 현재 삶에서 정서적인 안정감과 친밀감으로 서로를 배려하면서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을 꿈꾸는 것이 백년해로하는 것이고 웰다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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