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팝송 하나가 계속 생각난다. 킹스턴 트리오가 불렀던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이란 노래다. 당시 한국과 베트남 전쟁에서 죽어간 수많은 미국의 젊은 병사들, 그리고 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젊은이들을 추모하는 노래로 불려진다. 이 노래의 가사는 피트 시거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러시아의 고전 작가 미하일 솔로호프의 작품을 읽고 만든 것이다.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가 없음’을 일깨워주는 이 노래가 왜 떠오르는 것일까.
최근 아파트 높은 층이나 옥상에서 초ㆍ중학생이 물건을 던져서 발생하는 사건이 잦다. 아파트 10층에서 돌을 던져서 지나가던 사람이 맞아 머리를 다치고 사망하기까지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엘리베이터 안 벽면에는 자주 글이 나붙는다. 방송도 가끔 들린다. 아파트 창문에서 밖으로 오물이나 물건을 투척하지 말라고 잊을 만하면 눈에 뜨이고 귀에 들린다. 주로 아이들이 저지른다.
이전에도 아이들은 뭔가 이것저것 던지면서 놀았던 것 같다. 어쭙잖게 야구 한다고 교장실 창문으로 홈런치고, 골목길을 누비면서 놀다가 짱돌을 잘못 던져서 남의 집 봉창을 박살 내기도 하고, 눈싸움할 때 눈뭉치 속에 나무토막을 넣어 미운 친구 이마 구멍 내고…. 그래서 혼은 났지만 놀 공간이 있었고 뛰고 굴리고 시원했다.
18층 고층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왜 옥상으로 갔을까? 혹시 놀 공간을 찾아서는 아닐까. 놀이터는 아파트마다 다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씩이나 되는 아이들이 그곳에서 노는 것이 눈에 띄었다가는 어떤 불벼락을 맞을지 모른다. 우리 아이들에게 학교와 학원 외에 허락돼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얼마나 있을까. 놀 시간, 놀 공간이 아이들에게는 허락돼 있지 않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뭔가 놀려고 옥상으로 간 것은 아닐까.
놀이가 아닌 게임은 어디서든지 할 수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떤 게임이든 가능하다. 잘만 하면 학원수업시간에도 시도한다. 특히 승부를 겨루고 상대를 예사로 죽이는 게임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몰래 할수록 스릴 있다. 고전적인 비행기 게임에서부터 격투기 게임까지… 누군가를 몽둥이로 쳐 죽이면 상대방의 아이템은 내 것이 되기도 한다. 서로 동의하고 싸웠다면 결투일 것이고 뒤에서 쳤다면 강도다. 강도 짓은 게임상에서도 불법이지만 남들도 다하니까 나도 한다. 혼자서 힘들면 혈맹을 꾸린다. 사람들을 많이 모아서 만든 혈맹일수록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 24시간 보초도 서고 딴 놈이 접근하면 죽인다. 가히 조폭세계다.
아이는 더 이상 아이템 살 돈이 없었는지 모른다. 혹여 떨어진 성적 때문에 컴퓨터는 고사하고 엄마에게 스마트폰을 압수당했을 수도 있겠다. 속은 상하고 아파트 옥상, 아니 어른들이 보지 않는 공간에서 좀 놀고 싶었는지 모른다. 답답한 심정을 풀면서 놀아야겠는데 뭔가 없다. 그래서 게임을 통해 학습된 습관 하나가 생각났다. 겨냥해서 맞추는 거. 옥상 바닥에 있는 벽돌을 집어 들었다. 벽돌을 들고 낙하운동을 실험해보고 싶었다고 해도 그냥 낙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게임처럼 뭔가 맞추고 싶지는 않았을까. 게임세상의 규칙은 겨냥하고 맞춰서 없애면 내게 돌아오는 것이 있다. 그러니 습관처럼 겨냥하고… 아이는 그렇게 게임과 현실 사이에서 잠깐 길을 잃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놀이야말로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노래가사를 확장시켜 보자. 꽃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놀이터가 사라지고, 아이들이 사라지고, 그렇게 아이들이 옥상으로 간 까닭을 우리는 이미 안다.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사실은 다 안다. 잔인한 어른들이 짐짓 그 사실을 모르는 척 흥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이 만든 게임규칙을 이어가기 위해서. 그 대신 우리 아이들은 어떤 세계에 살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빼앗겨 버렸다.